[역경의 열매] 재난 전문의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김동수 교수 (8)
[국민일보]|2006-06-21|35면 |05판 |문화 |기획,연재 |1517자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직업에 맞는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의사인 내게 당연히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 귀국하기 전에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병 고치는 은사를 영혼 구원하는 데 사용하신다.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입원한 초등학교 5학년인 환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관절경 시술을 받기 위해 정형외과로 입원했지만 시술보다 약물치료가 우선돼야 했기 때문에 우리 소아과로 왔다. 이름은 정훈이. 관절염이 너무 심해 오른쪽 무릎이 ‘ㄱ’자로 굳어지고 있었다. 정훈이는 걸을 때도 절룩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뼈와 척추까지 통증이 와서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너무 불쌍했다. 나는 병실 회진을 마치고 혼자 정훈이 병실로 들어갔다. 먼저 정훈이 엄마에게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었다. 말을 붙이기 위해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정훈이 엄마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이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남편은 독실했지만 자신은 원래 종교가 없었다고 했다. 결혼 후에 자신이 안 나가게 되니 남편도 교회를 안 나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 되고 보니 그것이 죄책감이 되어 늘 괴롭던 터였다고 했다.
나는 정훈이를 위해 안수기도를 좀 해주고 싶다고 했다. 솔직히 의과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의학적 치료가 아닌 기도로 치료를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정훈이에게 큰 기대는 말라고도 했다. 너무 아파하니까 연민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정훈이가 가장 아파하는 골반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다.
저녁 회진 때였다. 정훈이가 병실에서 절뚝거리며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훈이는 “그 기도 받고 나서 안 아파요”라고 말했다. 나도 놀랐다.
정훈이는 곧 퇴원했다. 5년 후 인천의 모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정훈이를 다시 만났다. 정훈이가 보여준다며 내민 것은 ‘체력장 만점’ 표시가 있는 종이였다. 정훈이는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이 구원 받은 것처럼 사람들을 전도하고 싶어요.”
나는 홍역에 걸린 소연이란 아이도 잊을 수 없다. 홍역도 홍역이지만 폐렴까지 겹쳐 탈수가 심한 상태였다. 고난주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부활의 축복으로 치료해주시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연이는 날마다 악화됐다. 급기야는 뇌염으로까지 발전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이런 경우 기도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도 소연이 상황을 엄마에게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 얘기를 했다. 소연이 엄마는 유년부 교사이기도 했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자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를 다닌다고 했다. 그후부터 교회에서 점차 멀어진 것이다. 소연이 엄마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다. 그리고 같이 소연이를 위해 기도했다. 소연이 엄마가 눈물로 회개도 했으니 이번에도 소연이가 괜찮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