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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6·25전쟁 중 교회서 태어나

나는 챔피언이다. 복싱으로 한국·동양·세계 챔피언을 다 해봤다.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과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등 두 체급을 한국인 최초로 석권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15회 판정으로 이기고 어머니에게 전한 이 말이 한동안 회자됐다. 어머니는 그때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감격했다.  

‘4전5기’의 주인공.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결정전에서 상대를 3회 KO로 눌렀다. 4번 다운되고 일어나 이겼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고백하지만 내가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긴 경기들이었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나는 1950년 7월 11일 6·25전쟁 때 지금 서울 장충동 신광교회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나보고 ‘전쟁통에 폭격이 심한 날 교회에서 너를 낳았지’라고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독실했다. 돋보기를 내려쓰고 성경을 읽던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는 ‘제2교회’를 섬기셨다. 그 교회를 지을 때 못을 박으며 같이 지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후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의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34세 때였다. 할머니는 홀로 큰고모,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작은 고모 이렇게 넷을 키우셨다.


어릴 때 내가 복싱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복싱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관심이 많았다. 우리 동네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87번지였다. 지금 서울경찰청 맞은편이다. 나는 수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앞집에 복싱 선수가 이사를 왔다. 바로 김준호 선수였다. 아버지는 그의 엄청난 팬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김 선수의 복싱 시합을 보러가곤 했다. 김 선수가 1974년 남아공에서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김 선수와 호형호제하던 아버지는 복싱을 사랑했다. 김 선수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던 날 섭섭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김 선수의 아들은 수송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 친구와의 작별도 참 아쉬웠다. 

아버지는 1964년 8월 4일 아주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와 같이 마루에서 주무셨는데 심장마비였다. 내가 열네 살로 중앙중학교 2학년일 때였다. 등굣길에 복싱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에 앉아 “어, 우리 육사생도 들어오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남대문시장 입구에 있는 한 가게에 미제 복싱 글러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했고 모은다고 모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 글러브를 보면서 돈을 다 모으기 전에 누가 사가면 어쩌나 싶었다. 그리고 멀리 그 가게의 복싱 글러브를 보면서 ‘아직 안 팔렸구나’라고 마음 놓으며 집으로 향하던 생각도 난다. 

정리·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50년 서울 출생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밴텀급·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WBA 주니어페더급 전 챔피언 △KBS 전 복싱 해설위원 △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현 구리 예빛교회(홍수철 목사)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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