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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4> 아들의 시각장애 인정한 아버지 맹학교 입학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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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6. 3. 2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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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내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오히려 힘든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야외수업이었다. 야외수업은 중학교 때보다 늘었다. 중학교 때는 체육만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교련이 추가됐다.


교련시간은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정상 시력을 가진 친구들도 교련복을 갈아입고 발목보호대인 각반 등까지 차고 나가려면 휴식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제시간에 운동장에 집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제식훈련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내겐 이런 것들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내게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었다. 다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느라 바빴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우리 두 아들의 시각장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조금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각장애는 사실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이처럼 힘겹게 생활하는 것을 보자 아버지도 현실을 직시하셨다. 게다가 동생 역시 점점 시력이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다량의 수면제를 구해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은 이 수면제를 나눠 먹고 방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아버지도 별말씀 없으셨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모든 설움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이웃에 사는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그분이 한곳에 누워있는 우리를 발견해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우리는 위세척을 하고 모두 살아났다. 


아버지는 이후 달라졌다. 이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일반 학교인 서울 우신고등학교에서 나를 중퇴시키고 여의도고등학교에 데려갔다. 여의도고등학교에는 약시학생을 위한 전용학급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내가 약시가 아니고 전맹에 가깝다며 입학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나를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데려갔다. 하지만 서울맹학교는 내가 점자를 모른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대전에도 맹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찾다 찾은 곳이 서울 북한산 아래 한빛맹학교였다. 


한빛맹학교는 고 한신경(1920∼1990) 권사가 설립한 특수학교다. 한 권사는 평생 시각장애인 복지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한빛맹학교에는 당시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또한 나는 점자를 잘 몰랐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고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니 서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빛맹학교를 찾아간 날이 겨울이었다.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아마 당시 서러운 마음에 그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한빛맹학교에 입학한 뒤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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