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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2> 일곱 살 때 술래잡기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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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6. 3. 1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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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6년 경북 금릉군 증산면 장전리라는 곳에서 세 살 터울의 동생을 둔 맏이로 태어났다. 금릉군은 행정구역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곳으로 아주 시골이다. 


할아버지는 동네 유지셨고 5남매를 두셨다. 아버지는 막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7세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사랑도 많이 못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살았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해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어 가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진 탓에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나와 동생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공부를 잘했다. 다만 둘 다 눈이 지독히 나빴다. 야맹증이 심해 밤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게 되면 손으로 휘휘 저어 앞에 사물이 있나 확인하며 다녔다. 그 모습이 친구들 눈에는 동굴 속에 사는 박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박쥐’였다. 


낮에도 잘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7세 때는 오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시절 흔한 놀이 중 하나가 ‘다방구’ 놀이였다. 전봇대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일종의 술래잡기다. 


그날은 내가 술래였다. 나는 친구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면서 구덩이에 빠졌는데 오물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구덩이를 보고 잘 피해서 다녔지만 나는 그 구덩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천천히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거의 목까지 잠겼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앞에 긴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꽉 잡고 빠져나왔다.


근처를 지나던 어른이 나를 보고 나뭇가지를 찾아 건넨 것이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몽둥이로 엄청 맞았지만 오물 구덩이에 빠졌을 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초등학생 때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이란 진단을 받았다.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하는 야맹증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 실명하는 병이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다닐 만했다. 구로초등학교 시절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제일 앞에 앉혔다. 교과서 글자도 커서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잘하자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0’이 무엇을 나타낸 것 같니?”라고 물으셨다. 아이들은 아직 자연수나 정수에 대한 개념조차 몰랐다. 그런 아이들에겐 버거운 질문이었다. 막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0은 자릿수를 의미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릿수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냐”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선생님의 격려는 두고두고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분은 유동찬 선생님으로 내 평생의 은사다. 어릴 때는 눈이 나빠 불편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좋았고 신났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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