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2006-06-13|31면 |05판 |문화 |기획,연재 |1566자
나는 믿음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무속신앙에 열심이셨다. 명절마다 제사를 지냈고 때마다 고사는 물론 정초 다음날엔 풍수막이를 한다고 굿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때 자주 집에 중이 드나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무속신앙은 할머니 때부터 이어져 온 듯했다.
그런 가정에서 내가 초등학교때 어떻게 교회를 나가게 됐는지 모르겠다.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당시 교회 종소리가 늘 정겹고 기뻤다는 것과 어느 크리스마스 때의 새벽 종소리가 내 마음에 깊은 평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내게 새벽 종소리는 더 없는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심각했다. 밤마다 불을 끄고 잠들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부모님께 잠이 들면 불을 꺼달라고 했고 연산군이 나오는 TV 드라마에서 연산군이 죽는 것을 봤을 땐 너무 무서워 밤을 홀딱 지새웠다. 교회에 나가게 된 후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다.
다행히 집에서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저러다 말겠거니 하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일이 생겼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겨울 내내 시름시름 앓으시던 아버지가 봄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기 무섭게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난리였지만 허사였다. 6월7일 새벽 명동 성모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청천벽력이었다. 말이 거의 없으셨던 분으로 그때껏 한번도 나를 나무라신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새벽 5시 집을 나서는 나의 가방을 버스정류장까지 매일 들어다주시던 분이셨다. 내게 넘치는 사랑으로 대해주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그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어느 날 앞에 앉으라고 하시더니 “동수야,교회 가지 마라. 아버지 돌아가신 게 다 너 때문이다. 한 집안에서 두 신을 섬기면 신끼리 부딪쳐서 우환이 끓이질 않는단다. 앞으로 교회에 갈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인자하신 분이셨다. 어머니에게 혼난 적은 단 한번 있었을 뿐이다. 누나와 다퉜을 때 어머니께서 “ 너 이놈의 자식,우리집은 화목한 집안인데?Y”라며 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셨다. 그런 어머니의 명령이었으니 나는 교회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교회는 가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숭실중 배재고 연세대학교까지 모두 미션스쿨을 다녔다.
다시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따라 월곡동의 한 교회에 갔다가 초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 전도사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주일에 늘 늦게 일어나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 교회에 갔다가 돌아오면 감쪽 같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하루는 그 전도사님께서 나를 주일날 교회에 꼭 나오라고 하셨다. 예전부터 나의 신앙을 알고 잘 계셨기 때문에 고등부 회장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주일 아침,교회에 가려던 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너 어디 가니. 교회 가지? 아버지 잡아먹고 엄마까지 잡아먹으려고 교회 가니?”
어머니 때문에 차마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그후부터 나의 영적 시련이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다시 부르실 때까지….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내가 쓴 기사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년 출석 100명 돌파 비결 알려 드립니다… 패스 브레이킹 목회 워크숍 (0) | 2012.12.13 |
---|---|
축구 스타들 간증 담은 ‘예수 영화 특별판’ 보급 (0) | 2012.12.13 |
[역경의 열매] 재난전문의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김동수 교수 (1) (0) | 2012.12.12 |
남편·아내 서로 변해야 행복하다… 전문가가 말하는 부부갈등 극복법 (0) | 2012.12.12 |
CCC 대학생 단기사역 출발… 1400명 방학 동안 18개국서 캠퍼스선교 (0) | 201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