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2006-06-16|31면 |05판 |문화 |기획,연재 |1379자
1982년 1월26일,군대에 입대했다. 군의관으로 발령 받기 전에 영천훈련소에서 지냈다. 그곳의 하루는 마치 사회에서의 1개월과 같았다. 뇌성마비가 될지 모르는 아이와 고혈압 후유증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아내를 두고 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고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어느 수요일,교회 의자에 막 앉자마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함이 밀려왔다. 썰렁하기만 한 군대의 교회가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옛날 중학교 합창단에 있을 때 불렀던 찬송가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얼마 후 아이와 아내의 건강이 회복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어 세례를 준비하셨다. 강원도 현리에 있는 102야전병원에 전입한 후 나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다. 내가 있는 숙소에서 군병원 교회까지는 10㎞쯤 떨어져 있었다. 그런 거리를 나와 퇴원한 아내,아이는 당시 군종참모 윤현수 목사님의 차를 타고 주일예배,주일밤예배,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했다.
9월이 되자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제가 무슨 믿음이 있다고 세례를 받습니까”라며 사양했지만 목사님은 꼭 세례를 주고 싶어했다. 곧 서울로 전보된다고 말씀했다. 하지만 증인이 없었다. 아내도 아이를 집에 놔두고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증인을 예배하셨다. 갑자기 서울에서 장모님이 오신 것이다. 아침에 미장원에서 머리를 만지다가 하나님께서 “강원도 현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우린 아이를 맡기고 교회로 향했다.
세례를 받은 날은 1982년 9월28일이었다. 내가 이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그날이면 우리집에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주신 목사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날이다. 그간의 신앙생활을 보고도 하고 세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도 드린다. 저녁식사를 대접한지 벌써 24년이나 됐다.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1986년에 시작한 미국생활은 연단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골 촌구석 버펄로로 보내셨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예배당을 찾아가 기도부터 드렸다.
“하나님 여기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1년에 2편씩 2년내에 논문 4편을 쓸 수 있게 역사하옵소서.”
연구논문은 내가 미국에 간 목적이자 당시만 해도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기도 때문인지 처음엔 논문을 쓰기 위한 실험이 잘 됐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실험이 거의 중단 상태가 됐다.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험에 진척이 없었다. 매일 기도했지만 실험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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