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4)
[역경의 열매] 김우정 (4) “한국서 용한 의료진이 왔다”… 환자들로 북새통

 

처음 헤브론병원은 조그마한 별장같은 집을 리모델링한 클리닉이었다. 의료장비도 별로 없고 한국 의료인 4명, 캄보디아 직원 5명의 아주 작은 규모였다. 개원한 지 한두 달 되니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료인데다 외국 의사들이 진료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잘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가난한 캄보디아 환자들이 의사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을 때였다. 시골 할머니들이 작은 방에 가득 들어와 방 안 온도가 32도까지 올라갔다.

병원 부지는 있었다. 충무교회가 사 준 땅으로 건기에 구입했다. 그게 문제였다. 2월에 계약했는데 그때는 땅이 바짝 말랐을 때였다. 나무도 있고 꽃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 싶었다. 큰 연못도 있었고 낭만적이었다. 그해에는 괜찮았다. 비가 많이 안 왔으니까. 그 다음해 2008년 8월 홍수가 났다. 비가 3일 동안 엄청나게 내리자 연못이 범람했다. 온누리교회팀 50여명이 단기선교를 왔을 때였다. 

프놈펜은 평지다. 사방 50㎞가 그렇다. 그래서 저지대는 물이 찬다. 병원 부지에 큰 연못이 두 개 있었는데 한 웅덩이는 메웠지만 남은 웅덩이는 물로 가득찼다. 메운 웅덩이는 한국에 남겨둔 병원이 임대되면서 그 보증금으로 흙을 사다 채웠다. 

메운 땅도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의료팀이 왔다고 하니까 몰려온 사람들이 그 위에까지 가득 채웠다. 2000여명은 됐던 것 같다. 줄을 세우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 시간 정도 노력하다 절반을 집에 보냈다. 

비는 멈추지 않았고 진료실과 약 상자가 쌓인 방까지 물이 들어가려 했다. 화장실은 이미 범람했다. 일단 방이 침수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온 시내를 뒤져서 마대 자루를 사다가 200여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쌓았다. 2~3일을 겨우 견뎠다. 지대가 조금 높은 대문가에 천막을 치고 진료했다.

병원 건물이 절실해졌다. 그즈음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의 소아과 병원 자리를 임대한 이가 아예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 푼도 깎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거 팔리면 캄보디아에 병원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을 팔고 8월 중순쯤 잔금을 받았다. 그러고 한 달도 안 돼 미국발 금융 위기가 오면서 환율이 폭등했다. 잔금까지 다 받아 고환율로 인한 손해를 극적으로 피한 것이다. 할렐루야.

병원 건축을 시작했다. 어느 대학 교수가 멋진 설계도와 조감도를 그려줬다. 너무 친환경으로 하는 바람에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냈다. 이어 평생 교회를 설계했다는 한 장로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돈이 없어 설계비는 못 드린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설계도를 그려왔다. 그것이 지금의 병원이다.

건축에 대해 경험도, 아는 바도 없었다. 그냥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2008년 10월 기초공사를 시작하고 11월 25일 충무교회팀, 헤브론 캄보디아 의료선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공 예배를 드렸다. 시공은 한국업체에 맡겼다. 캄보디아 업체는 우리가 제때 공사비를 주지 못하면 벌칙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업체는 그렇게까지 요구하진 않았다. 공사비가 부족해 언제든지 공사가 중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공사가 진행되는 22개월간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그것도 2008년 9월부터 시작한 세계적인 금융위기 중에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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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우정 (3) 망설이던 아내 “당장 병원문 닫고 캄보디아 가자”

관광지에서 찍은 김우정 원장과 아내 박정희씨 모습.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8254&code=23111513&cp=nv

맞장구를 쳤다. “맞아. 성령님이 주신 생각이야. 우리가 교회에서 크고 결혼하고 리더도 됐잖아. 그동안 병원도 잘되고 물질적인 복도 잘 누리고 살았잖아. 이제는 복을 나눠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캄보디아에서 살면 어떨까.”

젊어서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부모님이 북한 실향민 출신이어서 의사가 된 후에는 북한 의료선교에 쓰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캄보디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캄보디아에 소아과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지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내도 “맞아, 그럴지도 몰라”라고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아내는 “그러면 애들 결혼 시키고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 싶을 때 가자”고 했다. 10년 후쯤.

내 생각은 달랐다. 가려면 빨리, 당장, 젊었을 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50세 넘었을 때인데 10년 후, 60세면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못 하지 싶었다. 아내에게 빨리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난 2005년 9월 둘째가 군 제대 후 복학했을 때 아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 가려면 병원을 처분해야겠지? 우리 생활비는 누가 안 도와줄 테니까. 이거라도 팔아야 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걱정 마. 병원 처분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위치도 좋고 병원도 잘 되니까.”

하지만 병원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거봐. 하나님의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이 계획하셨으면 병원 처분이 이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라고 했다. 일리가 있었다. 캄보디아 의료선교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나만의 생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께서 손해 보는 연습을 해 보라는 것은 아닐까. 선교사로 살려면 늘 손해 보듯 살아야 하니까.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다음 날 아침 “당신 말이 맞아. 문 닫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2005년 12월 31일 폐업 감사예배를 드리고 문을 닫았다. 병원 입구에 “캄보디아 의료선교사로 떠납니다. 그동안 병원을 이용해주신 환자, 보호자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한 달 후 2006년 1월 26일 섬기던 충무교회 선교팀과 같이 캄보디아로 향했다.

가자마자 일할 곳을 구했다. 의사신문 광고를 보니까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정형외과에서 캄보디아에 클리닉을 만들었는데 진료할 의사를 구한다고 했다. 클리닉은 프놈펜 남쪽에 있었고 1년 4개월간 일하면서 캄보디아와 의료선교를 배웠다. 그때 의료선교를 제대로 하려면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지인 의사도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어야 지속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2006년 한국에선 새로운 선교지로 캄보디아가 주목받았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처참한 시기를 겪고 10여년간 정체 상태에 있다가 회복되고 있었다.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실제로 상당히 많은 서구의 구호단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전엔 한국선교사들이 중국 몽골 필리핀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주의로 선교가 어려웠고 몽골은 인구가 너무 적었고 필리핀은 가톨릭이 강세여서 열매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는 100번째 캄보디아 선교사였다. 지금은 선교사가 1000명 이상 된다. 동역할 의료선교사들이 눈에 띄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설득하고 의논한 결과 2007년 9월 3명의 의료선교사와 함께 헤브론병원을 열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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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우정 (2) 소아과 의사로 잘 나가던 어느 날…

김우정 원장(앞줄 맨 왼쪽)이 2007년 1월 충무교회 단기팀과 대나무 평상 기차를 타고 캄보디아 뽀삿지방에서 오지마로 들어가고 있다. 헤브론병원 제공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8011&code=23111513&cp=nv

재수할 때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버지와 큰 형은 “역사는 무슨 역사냐. 의대가 괜찮아 보이는데 그거 해라. 가톨릭 의대도 괜찮다더라”고 하셨다. 이후 생각 없이 계획 없이 재미 없이 의예과를 다녔다. 관심은 인문학이었다. 반독재 데모도 많이 했다.

마냥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1978년 2월 졸업과 함께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81년 4월 제대하고 서울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 수련의를 거쳐 85년에 소아과 전문의가 됐다. 교회 동기와 결혼도 했다.

소아과 의사로 잘사는 일만 남았다. 당시는 소아과 병원 깃발만 꽂으면 그냥 잘 될 때였다. 80년대 중반 신생아가 80만명이었고 전국에 의사는 2만여명, 소아과 전문의는 1300여명 정도밖에 안 됐다.

나는 한 소아과 전문병원에서 1년을 일하고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달동네에서 개업했다. 목표도 정했다. “정직한 의사가 되자.” 병원은 잘 됐다. 15년간 열심히 일했다. 동네 사람들은 인심이 좋았다. 과일도 채소도 갖다주곤 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의료보험이 도입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각박해졌다.

2000년 경기도 용인 수지 신도시로 병원을 이전했다. 여기에서도 15년 일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목표도 다시 세웠다. “환자 눈높이에 맞춰 서비스 잘하는 의사가 되자.” 평범한 의사로서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한데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2004년 설 때였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캄보디아로 의료선교를 가려는데 의사가 부족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약품을 챙겨 합류했다. 의료 선교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도 몇 번 갔었다. 학생 때부터 오지, 보육원 등에서 봉사했다. 의료선교도 평범한 의사로서의 일상 같은 것이었다. 의료선교를 다녀오면 금세 잊었다. 주중에는 병원 일로, 주말에는 교회 일로 바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20년을 살았다. 2주만 지나면 어디를 갔다 왔는지조차 기억 못했다. 보통은 그랬다.

그런데 그해 2월 다녀온 캄보디아 의료선교는 달랐다. 자꾸 캄보디아 생각이 났다. 캄보디아 아이들 눈망울이 떠올랐다. 의외의 질문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캄보디아에 다시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러다 2, 3개월 지나면 진정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환자든 친구든 누구든 전혀 묻지도 않는데 캄보디아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6개월을 살았다.

진료할 생각은 않고 허구한 날 ‘캄보디아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아내가 캄보디아를 같이 가보자고 했다. 7월쯤 일정을 잡았다. 의료선교는 2월에 갔다왔다.

6월 말이 됐다. 10여년 병석에 계시던 장인이 돌아가셨다. 장인은 예장통합 측 총회장을 역임하신 박종렬 목사님이셨다. 큰 딸인 아내는 무척 슬퍼했다. 이 상황에 무슨 캄보디아냐고 했다. 겨우 설득해서 캄보디아를 찾았지만 캄보디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생각만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한 수상마을에 들어갔다. 엄청 더운 날이었다. 선교사의 안내로 수상마을 한복판에 있는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아내가 선교사에게 물었다.

“이런 배를 만들려면 얼마나 있어야 해요? 이런 배만 하나 있어도 선교에 큰 도움이 되겠죠? 한쪽에선 진료하고 한쪽에선 주일학교도 열고.”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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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우정 (1) 청년시절 나는 교회 죽돌이였다

김우정 원장(오른쪽)이 헤브론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고 정기 검진차 방문한 어린이 및 부모들과 포즈를 취했다. 헤브론병원 제공 

2007년 9월 개원하고 두어 달쯤 지났을 때였다. 퇴근했다가 볼 일이 있어 밤 9시쯤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병원 문 앞에 30여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캄보디아 프놈펜도 많이 발전해 저녁에도 병원 주변이 북적거린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알고 보니 이들은 다음 날 아침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 온 환자들이었다.

캄보디아도 여러모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의료 환경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의료혜택이 돌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무료로 진료, 치료하자며 한국 의료진 몇 명이 연합해 세운 병원이 헤브론병원이다. 장기적으로는 의료진을 길러내고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120년 전 한국을 찾았던 서양 의료선교사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헤브론병원은 현재 캄보디아 선교의 기지병원으로 불린다. 진료,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에 나가 선교한다. 또 한국에서 온 많은 의료인이 이곳을 거점으로 의료선교 활동을 펼친다. 병원은 현재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심장내과, 정신과, 치과 등에 한국 의사가 상주하고 캄보디아 의사 20여명이 같이 일하는 중형급 병원이 됐다. 매일 300여명의 외래환자와 입원 수술 환자들이 병원에서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다. 심장센터도 세워 직접 심장 수술도 한다. 그동안 400여명이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12년을 지내고 이제는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특별히 암 진단과 수술, 심장 수술, 안과 수술 분야에서 특화된 병원을 지향하고 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특별히 이번에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내 삶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돼 감사하다.

부모님은 북한 신의주 밑 철산에서 태어나셨다. 한국에 복음이 먼저 들어온 지역 중 한 곳이지만 어머니만 교회에 가본 적이 있으셨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직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셨고 우리는 서울 남대문 시장 초입의 목조로 만든 2층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나는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앙생활은 교회가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누린 혜택이라고 볼 수 있다. 1901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상동감리교회가 집 근처에 있어 4~5세 때 그곳에서 자주 놀았다. 남산동 산동네에 집을 사서 이사해 남산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와 집 사이에 충무로교회(현 충무교회)가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교회의 한 행사에 두 살 위인 누나와 함께 참석했다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청년 때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고 아버지는 후에 장로가 되셨다. 

나중에 의사가 됐지만 어릴 때는 공부를 안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교육열이 상당했던 터라 그 분위기에 편승한 것 같다.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에 다녔고 개발독재 정권으로 사회가 워낙 시끄러울 때여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첫 대학 입시 때 떨어지고 말았다.

김우정 원장 약력=1953년 서울 출생, 가톨릭 의대 졸업,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김우정소아과의원 원장, 로뎀소아과의원 원장, 충무교회 장로, 캄보디아 의료선교사, 헤브론병원 원장, 대통령표창, 자랑스런 경기고 동문상, 자랑스런 가톨릭대 동문상, 이승휴사상선양회 봉사상, 한경직목사 기념사업회 봉사상 수상.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7850&code=23111513&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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