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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7> 맹학교 후배 빨리 가르치고 싶어 대학 조기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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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6. 3. 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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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교사가 되려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인간관계를 깨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했다고나 할까.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조기 졸업을 했다. 성적이 우수해 7학기 만에 학부를 마친 것이다. 내 안에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맹학교에 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졸업했으니 이제 현장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있었다. 


1992년 모교인 한빛맹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지지해주셨던 한신경 교장 선생님이 90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학교에는 이전에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생님들만 계셨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암 투병 중에도 나와 동생 용수를 불러 장학금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곤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양수야, 네가 똑똑하니 한빛맹학교의 교장을 잘 맡아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비하면 한빛맹학교는 보잘것없었다. 지금 한빛맹학교는 학생 수가 140여명이지만 당시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맹학교는 한빛맹학교를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빛맹학교 학생들이 서울맹학교로 가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셨던 한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언젠가 교장을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빛맹학교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맹학교 제자이자 후배들과 수시로 대화하며 미래지향적인 학교발전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내가 교장이 되면서 모토로 삼았던 ‘하나님 중심의 경영, 학생 중심의 경영, 청렴한 경영’이라는 학교 목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03년 한빛맹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됐다. 내 나이 서른일곱, 젊은 나이였다. 교장이 되고 나니 낙후된 학교 시설, 정체된 학교 분위기, 학생들의 이탈 상황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즈음 아세아연합신학교 교수로 계셨던 학부모 한 분이 교장실에 찾아왔다. 장학금 50만원을 기부하면서 한빛맹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의 격려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함께해주시며 도와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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