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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3)
신안군 증도에 있는 대초리교회 사진입니다.

신안군 증도에 있는 대초리교회 사진입니다. 

문준경 전도사순교기념관 취재차 갔을때 찍은 것입니다.

이 교회도 문준경 전도사 세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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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위치한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위치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입니다. 

올 여름 갔을때 찍은 사진들인데, 그냥 올려놓습니다. 

쓱 한번 보시면 될 것같습니다. 














아래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인근 우전 해수욕장이에요. 제가 갔을때는 이미 시즌이 끝난 터라.



솔무등 공원입니다. 문준경 전도사가 순교한 해변과 500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아래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가 보입니다. 




대초리 가는 길을 보여주고자 내비를 캡쳐했습니다. 


대초리 가는 길입니다.문준경 전도사는 이 길을 걸어다니며 전도했다고 합니다. 당시는 거의 자갈밭 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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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2부)] 전쟁 속 숭고한 사랑 실천… 2인 순교신앙 한국교회 밀알로


한국전쟁 때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했다. 그중에서 문준경(1891∼1950) 전도사와 손양원(1902∼1950) 목사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순교자다. 문 전도사는 전남 신안군 증도 복음화율을 90%로 만든 전도부인이었다. 좌익은 그런 문 전도사를 눈엣가시로 보고 무참히 살해했다. 손 목사는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한국전쟁을 맞았지만 피난 가지 않고 환자들 곁을 지키다 순교했다. 죽음도 불사한 채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한 이들의 순교신앙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주님 사랑 실천한 문준경 전도부인=문 전도사가 사역하다 순교한 신안군 증도는 ‘노을이 있는 풍경’으로 이름나 해마다 100만명이 찾는 관광지다. 하지만 휴가철이 끝나고 9월로 접어든 지난 3일 저녁에 찾은 증도는 한산했다. 증동리교회 앞 바닷가에는 뒤늦게 휴가를 온 듯한 가족과 한 쌍의 연인만 증도의 명물 짱뚱어다리를 오갈 뿐이었다. 


섬은 한적했지만 하늘은 노을로 장관을 이뤘다. 앞바다 작은 섬 위에 멈춘 것 같던 해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갯벌의 작은 물웅덩이들에 붉은 잔영을 만들었다. 더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65년 전인 1950년 10월 5일. 그날도 하늘은 노을로 더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선 참혹한 일이 벌어질 참이었다. 서울을 수복한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다. 증도에도 곧 국군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황한 좌익들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들은 총, 죽창, 몽둥이를 들고 마을 주민 20명을 증동리교회 앞 백사장으로 끌고 갔다. 우두머리 격인 자가 말했다. “저년은 알을 많이 까는 씨암탉 같은 년이야. 저런 지독한 년을 살려둘 수는 없지. 죽여 버려.” 


문 전도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문 전도사는 증도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역주민 대부분을 전도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나머지 일당은 주저하지 않고 문 전도사를 발로 밟고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찔렀다. 문 전도사의 시신은 모래사장에 버려졌고 8일 만에 수습됐다. 


문 전도사는 신앙을 갖기 전까지 한 많은 삶을 살았다. 1891년 신안군 임자도에서 태어난 그는 17세에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20여년간 시부모만 모시고 살았다. 두 번이나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목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의 한 성도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한 그는 전도에 온전히 헌신했다. 1931년 경성성서신학교(현 서울신대)에 진학했고 공부를 마친 문 전도사는 증도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 당시 북교동성결교회 담임이었던 이성봉 목사는 그가 1년 동안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도록 전도하러 다녔다고 전했다. 


문 전도사의 영적·도덕적 권위는 남달랐다. 마을의 싸움꾼도 문 전도사의 호통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철저한 헌신 때문이었다. 그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줬다. 아픈 자가 있으면 환부를 쓰다듬으며 “이 사람은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이곳에는 병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러면 병이 나았다. 마을에 장티푸스가 퍼져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갈 때 가족도 어찌하지 못하는 시신을 손수 거둬 장례를 지냈다.


문 전도사는 그날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 즈음 그는 목포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군에게 붙잡혀 목포로 이송된 뒤 감금돼 있다가 국군이 들어오면서 풀려난 상태였다. 주위에선 만류했지만 문 전도사는 증도 주민을 돌봐야 한다며 극구 증도로 향했다가 순교했다. 


문 전도사는 임자도에 진리교회, 증도에 증동리교회 등 6개 교회를 개척했고 5개 지교회를 만들었다. 신안군 14개 읍·면을 다니며 20여년간 군내 150여 교회에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증도 주민 2400여명 가운데 목회자 159명, 장로 81명이 배출됐다. 


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인 고 김준곤 목사, 신복윤 전 합동신학대학원대 총장, 고재식 전 한신대 총장, 정태기 크리스찬치유상담대학원대 총장 등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이 문 전도사 또는 그가 세운 교회를 통해 신앙을 성장시켰다. 


고 김준곤 목사는 2007년 CBS에 출연해 “문 전도사는 특유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성봉 목사가 부르던 희망가 부흥성가 천당가를 많이 불렀는데 그러면 동네 아낙네, 아이들에 이어 강아지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회고했다.


김헌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장은 “문 전도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낸 신앙의 산 증인”이라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교회 위기를 말하는 이 시점에 문 전도사의 순교신앙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으로 꼽히는 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으로도 불린다. 그만큼 손 목사의 사랑은 크고도 강력했다. 한센병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봤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용서한 그의 사랑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본이 되고 있다. 


190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손 목사는 일본 스가모 중학교를 거쳐 1929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까지 경남 밀양, 울산, 부산 등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그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애양원에 부임했다. 이후 10여년간 한센병 환자들의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환부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으며 그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도했다. 아예 한센병 환자들과 잠도 같이 자면서 돌보고 싶다며 자신도 한센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기까지 했다. 1948년 여순사건 때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손 목사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 한센병 환자들만 두고 갈 수 없어서였다. 이후 그는 팔과 어깨에 총탄을 맞은 주검으로 발견됐다.




애양원 성산교회 정종원 목사는 “손 목사는 남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작은 예수’였다”며 “우리가 통일을 이루려면 손 목사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자세로 북한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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