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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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8> 시각장애인으로 카이스트 박사학위 받은 동생


10여년 전 동생 용수(47)가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졌다.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우리 형제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나”라며 서럽게 울었다. 동생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적이 있다.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당황했다. 그 순간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일이 동생에게도 일어났다는 게 가슴 아팠다.


동생은 열일곱 살에 실명했다. 나는 차마 동생에게 내가 다니는 한빛맹학교에 오라고 할 수 없었다. 맹학교에 두 형제가 같이 있다는 게 나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했다. 동생은 맹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냥 검정고시를 치렀다. 평소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던 나와 달리 동생은 내성적이었다.  


동생은 순수과학에 관심이 많아 서울시립대 수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대학 측 행정직원들은 시각장애인을 받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아버지는 청와대에까지 민원을 넣어 동생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대학 내에서도 공부를 한번 시켜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동생은 실력대로 시험에 합격해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장애가 없어도 수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사실 불가능한 학문이다. 특수교육 대상자 특별전형이 보편화된 지금도 시각장애인들이 진학하는 학과는 거의 정해져 있다. 동생처럼 순수과학을 공부하는 시각장애인은 없다. 외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동생은 시시때때로 주목을 받았다. 대학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 학위를 차례로 취득하자 큰 화제가 됐다. 지상파 방송 세 곳이 동생을 저녁 주요 뉴스 시간에 소개했다. 심지어 대통령도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


동생이 쓴 논문은 ‘F2 상위에서의 팽창치환 연구’라는, 제목부터 난해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암호체계에 관한 것으로 이를 연구하는 데는 공간감각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에게 공간감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동생의 논문은 더 대단한 것이었다. 


동생은 지금 수학을 넘어 천체물리, 우주, 철학까지 폭넓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가진 지식과 재능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동생은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번은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우주와 자연에 관해 연구해보니 결론은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어.” 동생은 자연, 우주, 수학, 노장사상 등에 빠져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 동생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나는 소망한다. 동생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함께 예배드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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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교회 이정익 목사 후임으로 박노훈 목사 내정


서울 신촌교회 이정익 목사 후임으로 박노훈(사진) 연세대 교수가 내정됐다. 신촌교회는 최근 당회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21일 밝혔다. 박 교수는 4월 3일 교회 임시 사무총회의 찬반 투표와 지방회 승인 절차를 남겨두고 있다.

 

박 교수는 연세대 신학과와 서울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 신학석사, 밴더빌트대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내쉬빌연합교회에서 목회했으며 현재 서울 중앙교회 협동목사, 연세대 부교수, 교목을 맡고 있다.

 

박 교수는 올해 46세로 ‘다소 젊지 않느냐’는 지적도 받고 있지만 신촌교회 성도 60%가 40대 이하이고 이 목사도 46세에 부임했다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것이 교회 측 입장이다. 신촌교회 담임 목사 이·취임식은 5월 29일 열린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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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7> 맹학교 후배 빨리 가르치고 싶어 대학 조기졸업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교사가 되려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인간관계를 깨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했다고나 할까.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조기 졸업을 했다. 성적이 우수해 7학기 만에 학부를 마친 것이다. 내 안에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맹학교에 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졸업했으니 이제 현장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있었다. 


1992년 모교인 한빛맹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지지해주셨던 한신경 교장 선생님이 90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학교에는 이전에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생님들만 계셨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암 투병 중에도 나와 동생 용수를 불러 장학금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곤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양수야, 네가 똑똑하니 한빛맹학교의 교장을 잘 맡아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비하면 한빛맹학교는 보잘것없었다. 지금 한빛맹학교는 학생 수가 140여명이지만 당시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맹학교는 한빛맹학교를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빛맹학교 학생들이 서울맹학교로 가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셨던 한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언젠가 교장을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빛맹학교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맹학교 제자이자 후배들과 수시로 대화하며 미래지향적인 학교발전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내가 교장이 되면서 모토로 삼았던 ‘하나님 중심의 경영, 학생 중심의 경영, 청렴한 경영’이라는 학교 목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03년 한빛맹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됐다. 내 나이 서른일곱, 젊은 나이였다. 교장이 되고 나니 낙후된 학교 시설, 정체된 학교 분위기, 학생들의 이탈 상황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즈음 아세아연합신학교 교수로 계셨던 학부모 한 분이 교장실에 찾아왔다. 장학금 50만원을 기부하면서 한빛맹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의 격려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함께해주시며 도와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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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6>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1985년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이 생겼다. 나는 1기 입학생이 됐다. 학교는 처음에 여러모로 미흡했다. 대부분 선생님이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한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나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점자를 늦게 배운 탓에 읽는 속도가 더뎠다.


하루는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까지 지낸 고 강영우 박사가 한빛맹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저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강 박사님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셨으니까 나는 한 단계 높여서 서울대학교에 가자’고 결심한 것이다. 


고민이 생겼다. 고등학교 과정이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한빛맹학교에서는 서울대 진학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대학 진학을 위해 낮에는 맹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하지만 한빛맹학교 선생님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맹학교에서 배우면 되지 왜 학원에 가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생각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학원에 가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5공화국 시절로 재학생은 과외가 금지돼 있었다. 맹학교 친구들의 반응도 싸늘했다. 시기하고 비아냥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빛맹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전적으로 내 편이었다. 모든 편의를 봐주셨고 저녁에 학원에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검정고시 학원이 밀집한 서울 신설동으로 향했다. 처음에 그곳으로 가면서 시각장애인을 학생으로 받아줄 학원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고려검정고시학원 문상주 학원장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특히 학원의 강성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적극 지도해주셨다. 나는 이 학원에서 학원생 2000여명 가운데 1, 2위를 반복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를 보게 된 것도 원장님과 학원 선생님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었다. 문 학원장님은 서울시교육청을 찾아가 민원을 했다.  


1985년 8월 나는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검정고시는 서울 석관중학교에서 감독관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치렀다. 내가 처음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시각장애인 검정고시 응시가 줄을 이었다. 


이듬해인 1986년 11월엔 학력고사를 치렀다. 학력고사는 감독관이 옆에서 문제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점자 시험지를 통해 치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다. 나처럼 중도 실명자는 점자로 빨리 읽는 게 쉽지 않다. 결국 문제를 다 읽지도 못하고 답안을 제출했다. 


시각장애인 중에서는 성적이 전국 1위였지만 서울대에 입학하기에는 부족했다. 지금은 특별전형이라는 게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단국대 특수교육학과에 가라고 했고 나는 순종했다. 선생님이 교사를 하도록 한 데는 다 뜻이 있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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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5> 미국인 부흥사 안수 받으며 ‘영의 세계’ 깨달아


한빛맹학교 설립자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아꼈다. 선생님은 내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 왔기 때문에 잘 가르치면 뭐든 해낼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한빛맹학교는 중학교 과정만 있고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학생들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 고교 진학을 위해 다른 맹학교로 옮겨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제자들을 잘 키워 다른 학교에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당시 한빛맹학교의 한 선생님이 내게 한빛맹학교에서 공부하지 말고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교장 선생님은 이를 알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을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후문이다. 


한빛맹학교에 와 보니 내 장애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학교에는 나보다 장애 정도가 심하고 복합적인 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이 측은해 용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사주곤 했다. 옥수수빵을 자주 사줬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은 나를 잘 따랐다.  


한빛맹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빛맹학교의 기숙사 격인 맹아원에서 진행된 새벽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특별한 신앙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불교에 가까웠다. 교회라는 데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예배는 낯설었다. 또 그 시간이 아까웠다. 공부하거나 잠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벽예배에 꾸준히 나갔다. 그것이 학교 규율이었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이 새벽예배 참석을 특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4년 어느 날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서울 잠실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 미국에서 오신 구텔 목사라는 분이 강사였는데 당시 이적을 자주 보여줬던 유명한 부흥사였다. 구텔 목사는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을 일일이 안수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통역이 옆에 있었지만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아임 블라인드(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벗 아임 낫 디스어포인티드 앳 블라인드네스(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이 원트 투 비 어 헬렌 켈러(나는 헬렌 켈러처럼 되고 싶습니다). 플리즈 기브 미 위즈덤, 커리지 앤드 인텔리전스(제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십시오).” 


구텔 목사가 안수하자 내 몸이 뒤로 확 밀렸다. 순간 확신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가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은 내게 꿈을 통해서 위로해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물에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삶의 역경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꿈은 생생했다. 


처음에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없어 맹학교에 온 것이 그렇게 속상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빛맹학교에서 신앙의 토대를 세웠고 하나님을 만났다. 물론 늘 감사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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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4> 아들의 시각장애 인정한 아버지 맹학교 입학시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내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오히려 힘든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야외수업이었다. 야외수업은 중학교 때보다 늘었다. 중학교 때는 체육만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교련이 추가됐다.


교련시간은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정상 시력을 가진 친구들도 교련복을 갈아입고 발목보호대인 각반 등까지 차고 나가려면 휴식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제시간에 운동장에 집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제식훈련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내겐 이런 것들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내게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었다. 다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느라 바빴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우리 두 아들의 시각장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조금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각장애는 사실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이처럼 힘겹게 생활하는 것을 보자 아버지도 현실을 직시하셨다. 게다가 동생 역시 점점 시력이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다량의 수면제를 구해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은 이 수면제를 나눠 먹고 방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아버지도 별말씀 없으셨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모든 설움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이웃에 사는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그분이 한곳에 누워있는 우리를 발견해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우리는 위세척을 하고 모두 살아났다. 


아버지는 이후 달라졌다. 이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일반 학교인 서울 우신고등학교에서 나를 중퇴시키고 여의도고등학교에 데려갔다. 여의도고등학교에는 약시학생을 위한 전용학급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내가 약시가 아니고 전맹에 가깝다며 입학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나를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데려갔다. 하지만 서울맹학교는 내가 점자를 모른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대전에도 맹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찾다 찾은 곳이 서울 북한산 아래 한빛맹학교였다. 


한빛맹학교는 고 한신경(1920∼1990) 권사가 설립한 특수학교다. 한 권사는 평생 시각장애인 복지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한빛맹학교에는 당시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또한 나는 점자를 잘 몰랐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고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니 서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빛맹학교를 찾아간 날이 겨울이었다.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아마 당시 서러운 마음에 그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한빛맹학교에 입학한 뒤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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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쿡] 밤엔 닫는 교회,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데가 없다


며칠 전 퇴근길에 집 근처의 한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고 이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입구 문에 ‘닫혔음’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그 다음 날 같은 교회를 갔습니다. 오후 10시가 안 됐을 것입니다. 다행이 닫혔다는 푯말은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리사무소에서 한 분이 뛰어 오시더니 “어디 가느냐”고 묻습니다. “기도하러 왔다”고 하자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교회에도 들렀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만의 특별한 경험인가 하여 지인 등에게 물었습니다. ‘문닫은 예배당’은 한국교회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굳이 예배당에 가서 기도해야 하느냐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니 아무 데서나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집중해서 기도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눈물 흘리며 매달리고 싶은 그런 날 말입니다. 


그런 날엔 기도원에 가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실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원은 작정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퇴근길에, 집에서 아이 재우고 기도하고 싶을 때는 근처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에 이 소식을 전했더니 ‘(그런 교회) 엄청 많아요’라는 댓글이 달립니다. ‘다 그래요’라는 댓글도 보입니다. 한 페이스북 친구는 “기도하러 근처 교회를 찾았는데 예배당 안쪽에서 어떤 분이 문고리를 잡고 안에 아무도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예배당 문을 닫는 이유는 많습니다. 도난, 방화, 화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또 비행 청소년, 노숙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올까 봐 문을 잠근다고도 합니다. 특히 새 성전의 경우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대안으로 교회의 일부 공간, 소예배당 등만 열어놓는 곳도 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교회가 많을 줄 압니다. 딱 꼬집어서 제시할 대안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는 기도의 집이므로 성도는 기도하고 싶을 때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예배당을 찾았는데 교회 문이 굳게 잠겨있다? 대안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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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3> 중학교 첫 시험부터 문제지 글자 안보여 절망


많은 기대를 안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좌절해야 했다.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교과서를 받았는데 과목 수가 늘어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교과서의 글씨가 너무 작았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책의 글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도와줄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거의 첫 시험이었던 것 같다. 문제지를 받았는데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인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감독 선생님께 문제지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새로 받은 문제지도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시험지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진 것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했다. 순간 두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살아온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일단 대충 시험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닥쳐올 인생에 대해 생각해봤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버거운 삶을 그려봤다. 


지금은 여건이 좋아져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 컴퓨터 음성지원을 통해 공부할 수도 있고 ‘점자정보단말기’라는 시각장애인용 노트북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저시력 학생들은 휴대용 확대 독서기나 고정식 확대 독서기를 사용해 책을 읽을 수 있다. 본인에게 잘 맞는 보조기기를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30여년 전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공부를 못해 성적이 떨어지자 주변에 소위 불량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태권도 등을 배웠고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름 몸은 탄탄한 편이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게 없자 싸울 때는 겁도 나지 않았다. 소위 ‘학교짱’과 주먹다짐도 벌였다. 그러면서 나도 불량학생이 돼 갔다. 성적은 꼴찌에서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런데 막상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걱정이 앞섰다. 공부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이러다 갈 곳이 없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구석에 박아뒀던 교과서를 다시 꺼냈다. 친구들은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비웃었지만 난 절박했다. 시력이 나빠 기술을 배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했다.  


당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치러야 했다. 연합고사에서 점수가 나쁘면 거리가 먼 고등학교나 야간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글씨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합고사는 양호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줘서 보았다. 


결과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점수를 얻었다. 인문계 합격선 안에 들은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중학교에서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자체로 한동안 화제에 올랐다. 나는 당시 동네에서 명문으로 통하던 서울 우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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