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쓴 기사모음 (579)
[역경의 열매] 김양수 <2> 일곱 살 때 술래잡기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나는 1966년 경북 금릉군 증산면 장전리라는 곳에서 세 살 터울의 동생을 둔 맏이로 태어났다. 금릉군은 행정구역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곳으로 아주 시골이다. 


할아버지는 동네 유지셨고 5남매를 두셨다. 아버지는 막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7세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사랑도 많이 못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살았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해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어 가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진 탓에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나와 동생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공부를 잘했다. 다만 둘 다 눈이 지독히 나빴다. 야맹증이 심해 밤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게 되면 손으로 휘휘 저어 앞에 사물이 있나 확인하며 다녔다. 그 모습이 친구들 눈에는 동굴 속에 사는 박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박쥐’였다. 


낮에도 잘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7세 때는 오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시절 흔한 놀이 중 하나가 ‘다방구’ 놀이였다. 전봇대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일종의 술래잡기다. 


그날은 내가 술래였다. 나는 친구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면서 구덩이에 빠졌는데 오물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구덩이를 보고 잘 피해서 다녔지만 나는 그 구덩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천천히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거의 목까지 잠겼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앞에 긴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꽉 잡고 빠져나왔다.


근처를 지나던 어른이 나를 보고 나뭇가지를 찾아 건넨 것이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몽둥이로 엄청 맞았지만 오물 구덩이에 빠졌을 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초등학생 때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이란 진단을 받았다.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하는 야맹증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 실명하는 병이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다닐 만했다. 구로초등학교 시절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제일 앞에 앉혔다. 교과서 글자도 커서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잘하자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0’이 무엇을 나타낸 것 같니?”라고 물으셨다. 아이들은 아직 자연수나 정수에 대한 개념조차 몰랐다. 그런 아이들에겐 버거운 질문이었다. 막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0은 자릿수를 의미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릿수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냐”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선생님의 격려는 두고두고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분은 유동찬 선생님으로 내 평생의 은사다. 어릴 때는 눈이 나빠 불편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좋았고 신났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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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1> 어둠 속에 살다 맹학교서 찾은 ‘희망의 빛’


시각장애인들이 졸업하는 맹학교 졸업식에도 희망은 있다.  


보통 장애인 특수학교 졸업식에는 학부모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졸업하는 아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한빛맹학교’ 졸업식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지난달 19일 진행된 한빛맹학교 졸업식에선 장애인들, 학부모들이 희망을 나눴다. 상급학교나 대학에 진학했다고 기뻐했고, 중도 실명한 중·장년들은 새로 배운 안마기술로 취업하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이날 한빛맹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전달했지만 나도 30여년 전에는 저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약시와 야맹증을 갖고 태어났다. 고1 때는 완전히 실명했다. 이전에도 눈이 너무 나빠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과 전혀 안 보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명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고1 때였으니 당장 공부를 하려면 점자를 배워야 했다. 점자는 생각보다 어렵다. 


당시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빛맹학교를 만났다. 내게 한빛맹학교는 단순히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준 곳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간이었다. 


한빛맹학교는 하나님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실명 후 맹아원에서 지내면서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의무사항이어서 빠지진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때의 예배가 내 신앙의 불씨가 됐다.


그렇게 만나기 시작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는 시각장애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위한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의 이사장, 한빛맹학교 교장, 사회적 기업 ‘한빛예술단’ 단장을 맡고 있다. 한빛예술단은 안마사가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한 학생의 바람을 듣고 만든 시각장애인 예술단이다. 


안마를 통해 생업을 이어가기를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안마소인 ‘힐링센터’도 지었다. 장애 정도가 심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을 설립했다. 교회는 장로로서 서울 한빛교회(김하영 목사)를 섬기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살았다. 그러다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그 빛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나는 한빛재단을 통해 내 안에서 발견한 그 빛을 세상에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빛이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비전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진학과 취업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66년 경북 김천 출생. 시각장애인 첫 대입 검정고시 합격. 단국대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박사과정 수료.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 역임. 현 한빛맹학교 교장, 한빛예술단 단장,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 이사장,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회장, ㈔한국사회복지법인협회 부회장,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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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총선 예비후보자들 “할랄단지 반대”


전북 익산의 4·13 총선 예비후보자 9명이 25일 익산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익산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이날 익산 천광교회(안홍대 목사)에서 열린 ‘4·13 총선 예비후보자 초청 할랄정책 소견발표회’에서 “익산 할랄단지 조성에 적극 반대한다”고 밝혔다. 발표회는 익산시기독교연합회(회장 문영만 목사)와 익산시할랄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전춘식 이을익 목사)가 공동 주최하고 전북기독언론인연합회(회장 김영만 장로) 등 전국 53개 단체가 주관했다. 


발표회에는 익산갑의 국민의당 배승철 이한수 정재혁, 더민주당 이춘석 한병도, 새누리당 임석삼 예비후보, 익산을의 국민의당 김상기 조배숙, 새누리당 박종길 예비후보가 참석했다.


이춘석 예비후보는 “정부가 할랄단지를 다시 추진하면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약속했다. 조배숙 예비후보는 “할랄단지가 조성되면 무슬림 대거 유입이 불가피하다. 분명하게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한수 예비후보도 “특정 종교의 식품단지로 전락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대통령이 ‘노’라고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길 예비후보는 “무슬림이 주도하는 할랄단지 조성에는 적극 반대하지만 지역 경제를 위해 할랄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점은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참석해 ‘할랄식품과 동성애 등 차별금지법의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유 전 지사는 “정부는 할랄식품이 일확천금을 낳는 황금알인 것처럼 국민을 호도하면서 할랄식품단지 조성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할랄식품단지가 조성되면 이슬람에 대한 차별금지 문제가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사탄은 동성애 옹호로도 이어지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선하게 보이는 악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가 할랄식품 단지 조성 백지화를 확실하게 결정해 공표할 때까지 반대 운동을 계속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표회 후에는 특별기도회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익산에 할랄식품 단지가 조성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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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가, 두 크리스천 중 누구?… 서울신대, 애국가 작사가 규명 맞장 토론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를 놓고 16일 맞장 토론이 벌어졌다. 서울신대(총장 유석성)는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애국가는 안익태(1906∼1965)가 작곡했다고 알려졌지만 작사자는 규명되지 않았다. 정부는 1955년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했으나 ‘작자 미상’으로 결론 내렸다. 당시 작사자 후보로 5인이 거명됐으나 가장 유력한 이가 윤치호(1865∼1945), 안창호(1878∼1938)였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토론회에는 이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안용환 서울신대 초빙교수가 참석해 각각 ‘윤치호 작사설’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  


김 상임이사는 1955년 조사위가 윤치호를 작사가라고 결론 내렸으나 문교부가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확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주요한 위원이 ‘안창호 작사설이 있다는데 이것은 신화다. 윤치호는 논의해 볼 수 있다’고 했고 조사위 3차 회의 이후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로 결론 났고 확정하여 문교부에 보고할 것’이라는 각 일간지의 보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때 위원 13명 중 11명이 윤치호 작사설에 찬성했고 나머지 2명도 안창호 작사설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당시 김인식이 자기가 작사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윤치호가 자필로 쓴 ‘가사지’와 1908년 6월 발행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를 토대로 애국가에 ‘하나님’이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보면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윤치호는 일제강점기 조선 감리교의 ‘대부’이자 조선기독교 원로였다. 


또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라고 안창호가 직접 말한 것을 미션스쿨 대성학교의 수학교사 채필근이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안 교수는 “아이(애국가)를 해산하면 누구의 씨인지 가장 확실히 아는 사람은 산모인 아내”라며 “안익태는 자기의 남편(작사가)이 안창호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 관련한 증거로 당시 가사가 전달된 상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여주며 “안익태는 다과회 후 황사선 목사로부터 애국가의 가사를 정확하게 받아 적었고 황 목사는 (안익태에게) 이것이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안창호가 친필로 쓴 현재의 애국가 1∼4절과 후렴이 비슷한 ‘무궁화가 2’가 발견됐는데, 애국가인 ‘무궁화가’는 당연히 ‘무궁화가 1’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애국창가집에 수록된 안창호 작사의 ‘권학가’의 제목 밑에 ‘무궁화가와 한곡됴(곡조)’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며 “이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것을 확실히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론회 열기는 뜨거웠다. 참석자들은 200석이 모자라 이동 통로 바닥에 앉았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축사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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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제일교회, 미자립교회 6곳을 전면 리모델링해줬다


경남 창원제일교회(최준연 목사)는 2008년부터 경남지역 작은 교회 6곳의 리모델링을 지원했다. 단순히 도배하고 집기를 교체하는 수준을 넘어 성전 내·외부를 전면적으로 수리하고 새로 단장했다. 힘껏 작은 교회를 섬기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점차 커져 이제는 협력하는 교회들까지 생겨났다. 


산청성결교회(차동욱 목사)가 첫 지원 대상이었다. 창원제일교회는 2008년 이 교회의 성전 지붕을 교체하고 십자가 탑의 페인트칠을 새로 했다. 2009년에는 창녕제일교회(문종섭 목사)의 성전 안팎 벽면과 지붕, 천장과 사택의 장판을 교체했다. 2010년에는 밀양 수산제일교회(윤동석 목사)의 성전 창틀을 바꾸고 마루와 문, 지붕을 고쳤다. 2011년과 2012년에는 각각 밀양 대곡교회(김동환 목사)와 삼랑진제일교회(이인열 목사)의 리모델링을 지원했다. 2014년에도 밀양 청운교회(조일대 목사)의 울타리를 만들고 성전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했으며 교육관 싱크대를 교체했다. 각각의 공사에는 평균 3000여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최준연(62) 목사는 “가장 빛나야 할 성전이 가장 낙후된 것 같아 리모델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도배하고 페인트칠만 새로 하자고 생각했지만 2008년 리모델링 전문가가 교회 성도로 등록하면서 지원규모를 확대했다.  


창원제일교회가 작은 교회를 도울 땐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물 한 그릇도 요구하지 않는다’ ‘할일을 찾아서 한다’ 등이다. 모든 비용을 창원제일교회가 부담하고, 요구하기 전에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취지다. 


협력교회도 생겼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같은 지방회 소속인 김해제일교회(안용식 목사)와 창원성결교회(우재성 목사)가 돕겠다며 나섰다. 최 목사는 “큰 교회가 1년에 한 교회만 지원해도 어림잡아 10년이면 5만 교회가 새롭게 단장하게 될 것”이라며 “뜻을 같이하는 교회가 한국교회에 넘쳐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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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면 친정 오지 말라고 했지만 장 봐놓고 기다리는 마음 알까요?”… 방순원 장로 부부 설맞이


전북 익산시 영등동의 한 아파트. 거실 벽면에 대형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익산 사랑의동산교회 방순원(74) 장로와 정성자(67) 권사를 중심으로 세 딸 내외와 그들의 자녀들, 막내딸이 밝게 웃고 있었다. 방 장로는 “사진 속 초등학교 5∼6학년밖에 안돼 보이는 큰 손주가 벌써 고등학생이 됐다”고 말했다.


차를 한잔 내놓자마자 딸 자랑, 사위 자랑이 이어졌다. “하나님께 아들 같은 사위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아들보다 나아요.”(방 장로) “사위들이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어요. 저는 ‘어머니’라고 불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다들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예요.”(정 권사)


정 권사는 “우리 딸들이 그렇게 부르라고 시킬 리가 없는데 알아서 그렇게 부르니 얼마나 마음이 예쁜지 모르겠어요”라며 흐뭇해했다.  


방 장로의 첫째와 넷째 딸은 익산에 산다. 첫째 사위는 익산 ‘온누리아동병원’ 원장이고 지난해 결혼한 넷째 사위는 방 장로의 회사 직원이다. 둘째 사위는 김제에서 ‘제일신경정신과의원’을 운영하고 셋째 사위는 서울 광염교회(조현삼 목사) 교육담당 강성운 목사다.  


방 장로 부부의 마음은 명절을 맞아 집에 올 자녀들 생각으로 설레어 보였다. 하지만 명절을 앞둔 집답지 않게 주방이 깨끗했다. 음식재료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정 권사는 “딸들에게 시간이 안 되면 친정에 오지 말고 시댁만 다녀오라고 했다”며 “시부모에게 잘하면 된다고 늘 가르쳐서 별로 준비한 게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방 장로는 “말은 그렇게 해도 이것저것 사다가 벌써 냉장고에 넣어뒀다”며 웃었다. 


방 장로는 자동차와 농기계의 각종 스위치, 센서 등을 만드는 전자부품업체 ㈜기원전자의 대표이사다. 1986년 부도 직전인 회사를 인수해 연 매출 60억원의 건실한 기업으로 키워냈다. 직원들은 모두 크리스천이다.


익산시 장로회장을 지낸 그는 정확히 회사 순익의 10%를 십일조로 드린다. 이밖에도 교회에 필요한 재정이라면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지역 교계에 정평이 나있다. 그는 39세 때 월간 ‘신앙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후 새벽기도를 거의 빠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성경을 43번 읽었다. 정 권사는 “남편은 성경책을 아예 끼고 산다”고 말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가정에서 가부장적이기 쉽다. 하지만 방 장로는 이런 편견을 깨뜨렸다. 방 장로는 주방에 있는 정 권사를 불러 옆에 앉게 하더니 이야기하는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먼저 일어나 정 권사의 손과 발을 주물러서 깨운다고 했다. 


정 권사는 “젊어서 남편이 돕지 않았다면 딸 4명을 이렇게 키우진 못했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방 장로는 “우리 딸들이 엄마를 닮았다”며 “화목한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익산=글·사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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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교회의 해외교회 봉헌에는 김정호 수석장로가 있었네


충남 홍성 구성교회(최진 목사)의 12개 해외교회 봉헌은 성도들의 헌신 덕분이다. 


특히 이 교회 수석 장로인 김정호(55·사진) 장로의 역할이 컸다. 김 장로는 지금까지 교회 4곳을 세웠다. 첫 번째 교회는 아내, 두 번째는 본인, 세 번째는 딸, 네 번째는 아들 이름으로 봉헌했다. 그는 구성교회 예배당 실내를 전면적으로 바꾸고 노인들을 위해 2층 예배당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재정도 상당부분 책임졌다. 


축산업을 하는 그는 지금 돼지 2500여 마리를 키우고 있지만 한때는 렌터카로 불법 택시 영업을 해야 할 정도로 힘들 때가 있었다.  


“그때 인생 공부 좀 했어유. 우여곡절도 많았고유. 그런데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어유. 막판에 큰 사고를 겪으면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으니까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더라고유∼.” 


이후 갖게 된 비전이 아내와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자녀들에게도 “니들 교육시키고 남는 재산은 모두 선교하는 데 쓸 테니 유산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놨다. 


김 장로는 “사업을 하다 보면 재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며 “그래서 연초에 선교비를 미리 뚝 떼서 헌금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라고 말했다. 


“헌신도 힘 있고 능력 있을 때 하는 거지, 나이 먹고 힘없으면 못 해유. 빚은 항상 있지만 걱정은 안 해유∼.”


홍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홍성=글·사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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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의 한 시골교회가 4년여만에 해외에 12개 교회를 세웠다 - 구성교회


시골의 한 교회가 4년여 동안 해외에 12개 교회를 세웠다고 들었다. 시골교회라지만 그 정도 사역을 하려면 예배당도 번듯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배당은 지극히 평범했다. 야트막한 산들 앞에 펼쳐진 농지와 그 사이 군데군데 있는 농가의 한 틈에 교회가 있었다. 빨간 벽돌 3층 규모로 십자가 탑이 높이 솟은 충남 홍성의 구성교회(최진 목사) 이야기다. 


지난달 28일 구성교회를 방문했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홍성IC를 빠져나왔다. 수덕사로 방향을 잡고 5분여를 달리자 멀리 십자가 탑이 보였다. 교회 외벽에 붙은 간판 ‘구’ ‘성’ ‘교’ ‘회’가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이 4개의 글자에서 ‘구’자만 금빛이고 나머지는 은빛으로 색이 달랐다. 


최진(56) 목사는 “‘구’ 자가 떨어져서 다시 붙였는데 표면에 붙어있던 비닐이 벗겨져 변색됐다”며 “간판을 다시 하긴 해야 하는데 아직 손을 못 보고 있다”고 머쓱하게 웃었다. 건물 보수보다 선교가 먼저라는 이 교회의 목회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교회는 해외선교를 위해 인도 글로리교회(2012년)부터 캄보디아 하찬캄교회(2016년)까지 12개 교회를 봉헌했다. 교회 사무실 벽면에는 이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 순서대로 붙어있었다. 사진 속 성도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구성교회는 면 소재지에 있는 시골교회다. 성도는 세례교인 180여명. 이 교회도 여느 농촌교회처럼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2010년 당시 부채가 4억여원. 교회 옆에 수양관을 무리하게 지으면서 생긴 빚이다. 10년간 이자를 갚으며 빚에 눌려 있었고 이에 따른 영적 침체가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최 목사는 무엇보다 영적 쇄신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10년 송구영신 예배 이후 40일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최 목사의 이런 모습에 성도들이 감동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기도하는 목사님이네, 먼저 본을 보이는 목사님이네.” 이런 이야기가 성도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그러면서 성도들도 저녁마다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불과 두세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교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성도들의 영성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헌금도 눈에 띄게 늘었다. 교회는 1년여 만에 부채를 모두 갚았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발생한 것이다. 성도들은 걱정과 근심으로 어쩔 줄 몰랐다. 한 성도는 돼지 1만여 마리를 살처분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위기는 곧 기회”라며 “돼지를 안 묻는 방법을 달라고 기도하자”고 독려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구제역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구제역 발생 500m 이내의 모든 돼지 살처분’에서 ‘백신 접종’으로 바뀌었다.  


위기는 실제 기회가 됐다. 살처분 여파로 돼지 공급이 줄자 돼지 값이 폭등했다. 교회의 축산농가는 세상 말로 ‘대박’이 났고 헌금도 크게 늘었다. 


구성교회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때부터다. 재정이 넉넉해지자 최 목사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가 농촌교회지만 선교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하는 교회가 되자”며 “교회는 악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비상구 같은 존재다. 마지막 때일수록 곳곳에 교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동남아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2012년 1개, 2013년 2개, 2014년 4개, 2015년 4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비용은 각각 1000만∼3000만원이 들었다. 한 70대 성도는 미리 준비해둔 장례비용 2000만원을 내놨다. 한 권사는 갑상선암 진단비 전부를 헌금했다. 수술을 앞두고 직접 교회를 짓는 미얀마에 가서 봉헌예배를 드렸다. 


지난달 세운 1개를 포함해 올해엔 7개 교회를 세울 계획이다. 최 목사는 “처음에는 30개 교회만 지어도 감사하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한 가정이 한 교회를 봉헌해 100개 교회 봉헌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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