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쓴 기사모음 (579)
[역경의 열매] 김석봉 (14) 日 방송서 인터뷰 쇄도… 서울의 명물로 소개


서울 무교동의 토스트 노점상에는 외국인 손님도 많았다. 아침 손님 중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손님은 많아서 좋은데 마음이 불편했다. 국졸에 검정고시 출신이 외국어를 알 턱이 있나. 토스트를 들고 ‘이거냐’고 몸짓하면서 장사를 했다. 그냥 팔면 팔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온통 국제화를 외치고 있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원에 찾아갔다. 외국어를 배울 요량이었다. 그러나 학원비가 비쌌고, 무엇보다 시간이 안 맞았다. 나는 서점에 가서 책 3권을 샀다. 일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장사를 하면서 몇 마디를 쓰면 될까 생각했더니 많이 써야 20문장이라고 생각해 일어 영어 중국어를 20문장씩을 외웠다. 

손님 중에는 일본인이 제일 많았다. 그 다음이 영어권, 이어 중국인 순이었다.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하자 손님들이 아주 좋아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했다. 어떤 일본인은 팁까지 줬다. 제일 비싼 토스트 2000원짜리를 하나 먹고 만원을 냈다. 8000원을 거슬러 줬더니 도로 주는 것이었다. 4개 더 달라는 줄 알고 4개 더 주느냐고 했더니 팁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귀국한 뒤 소문을 냈다. 한국에 가면 무교동 토스트 노점상이 있는데 정말 맛있는 집이라고 소개했다. 또 일본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들이 꼭 나랑 사진을 찍자는 거였다. 토스트는 구워야 하는데 자꾸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중에는 거의 자동이 됐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각도에서 포즈를 취하고, ‘이치 니 산(하나 둘 셋)’이라고 외치면 토스트를 굽다 말고 얼굴을 내밀었다. 많을 때는 아침에 평균 30컷을 찍었다. 1년이 지나자 내 사진이 일본 내 한국 소개 사이트에 엄청나게 돌아다녔다.  

가끔은 국내 가이드가 일본인 단체손님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30여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은 꼭 여기를 가야 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소문이 나자 일본 NHK 방송이 인터뷰를 했다. 일본의 간사이 TV도 서울의 명물로 석봉토스트 노점상을 소개했다. 

심지어 토스트만 먹으러 일본에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인근에 있는 뉴서울호텔 지배인이 오더니 “호텔 옆에서 장사하셔서 아주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혹시 아침에 일본인 두 분이 토스트를 먹고 토스트 서너 개를 싸가지고 가신 분이 있지 않았느냐”고 했다. 지배인에 따르면 이분들은 어젯밤 늦게 투숙해서는 오전 8시에 모닝콜을 부탁했다. 그리고 나갔다 오더니 토스트를 몇 개 싸왔고 바로 체크아웃했다. 지배인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이 토스트를 먹으려고 일부러 늦게 한국에 왔다가 오전에 사서 다시 비행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벅찼다. 토스트를 먹자고 비행기를 탔다니.

또 기억에 남는 한 부부가 있다. 미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였다. 이들은 토스트를 먹고 가시다가 다시 오셔서 팁을 줬다. 꺼내보니 10만원이었다. “너무 많다”며 되돌려 주자 부부는 “한국에 매년 1주일씩 관광 겸 사진을 찍으러 오는데, 이렇게 입맛에 맞고 맛있는 토스트는 생전처음이어서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했다. 미국의 유명한 철강회사 회장님 부부라고 했는데 명함을 주시면서 미국에 오면 한번 꼭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13) 서비스는 얼굴 파는 것… 아침마다 웃는 연습


노점상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토스트를 만든 손으로 돈도 받고 잔돈도 준다. 잔돈은 기름이 묻어 지저분해진다. 누가 봐도 위생적이지 않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토스트 빵, 채소, 소스 통 등을 손으로 만지다가 돈을 받고 잔돈을 드렸다. 

‘토스트 굽고 주는 손과 계산하는 손을 달리할 수 없을까.’ 1주일 동안 개선 아이디어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깨끗한 수건을 쌓아 놓고 수시로 손을 닦았다. 토스트를 만들어 드리고 손을 닦고 돈을 받아 잔돈을 드렸다. 돈을 주고받고는 또 손을 닦고 토스트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손님들이 좋아했다. 깨끗해 보이고 손님에게 성의를 다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떤 손님들은 반대의견을 내놨다. 시간 낭비라고 했다. 출근 시간에는 초를 다툴 정도로 바쁜데, 언제 손을 닦고 빵을 주고 계산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셀프 계산. 고객들이 직접 계산하게 하자.’ 대개는 단골손님이고 또 줄을 서서 토스트를 받고 계산을 하니까 가능할 것 같았다. 100원짜리, 1000원짜리 잔돈을 넣어 셀프 계산대를 놨다. 어떤 분들은 계산을 하지 않고 가거나 잔돈을 많이 집어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자 정착이 됐다. 손님들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계산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했더니 토스트를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됐다. 셀프 계산대를 놓은 뒤에는 토스트를 배가량 더 팔 수 있었다.

가끔 장난치는 분도 있었다. “저 이 돈 갖고 튑니다.” 그럼 나는 맞장구를 쳤다. “저는 마라톤 선수였어요.”

또 하나, 고객을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을 바꿨다.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깜짝 놀랐다. 내 얼굴이 밝고 환한 얼굴이 아니라 긴장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토스트를 맛있게 만들고 깨끗하게 만들면 뭘 해, 이 얼굴 보고 맛있게 먹겠어?’라고 생각했다. 서비스는 얼굴을 파는 것이다. 연습해서라도 얼굴을 바꾸자고 결심했다.

아침마다 웃는 훈련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면서 5분씩 웃었다. 기준은 ‘윗니의 8개가 보이도록 웃는다’였다. 노점을 펼치고 판매 준비를 하면서도 웃는 연습을 계속했다. 토스트를 팔면서도 내가 지금 웃고 있는지 점검했다. 그렇게 3개월을 했더니 웃는 것이 습관이 됐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하루 매출이 배 이상 올랐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울상이었다. 화난 표정이었다. 토스트를 먹으면서도 ‘나 건들지 마세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때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좀 고쳐보자고 생각해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안부도 물었다. 

그러다 또 다른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이들을 웃게 하고 용기도 주면서 성경 말씀도 읽게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노점상 앞에 ‘금주의 메시지’라는 팻말을 붙였다. 두 종류의 문장을 적었다. 위에는 일반적인 명언을 적었고, 아래에는 잠언의 말씀을 적었다. 위부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래까지 읽게 하자는 것이었다. 말씀만 있거나 순서를 바꿔 위부터 말씀을 적으면 거부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이들을 칭찬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칭찬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토스트를 먹는 동안 머리, 메이크업, 안경, 넥타이, 스카프, 양복 등 어떤 포인트를 찾아 슬쩍 칭찬하는 말을 했다. 손님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입이 귀에 걸렸다. 장사는 더 잘됐다. 칭찬을 들은 손님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데려왔다. 보통 스낵카 안쪽에 10명, 바깥쪽에 40여명이 줄을 섰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12) 노점상도 서비스업… 청결한 ‘웰빙 토스트’ 개발


노점상도 서비스업이다. 토스트 노점상은 음식 서비스업이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서비스를 했다. 업계의 프로가 되고 싶었다. 노점상에서 토스트를 팔았지만 그렇다고 프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옷도 호텔 조리사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업계의 프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업을 마치면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리곤 했다. 오늘 오신 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불편해한 일은 없었는가, 서비스는 괜찮았는가 등을 생각했다. 또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프로는 확실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메모지에 적었고, 1주일 안에 적용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바꾼 것이 설탕을 줄인 일이었다. 웰빙 토스트, 요즘은 웰빙이라는 말이 흔하지만 당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였다. 토스트 안에는 계란이 들어간다. 그 계란에 설탕, 조미료 등을 뿌려야 맛이 났다. 하지만 나는 건강을 챙긴다고 집에서는 설탕을 먹지 않았다. 나도 안 먹는 설탕을 토스트에 뿌려도 되는 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지에 ‘설탕을 줄이자’고 적었다. 

각종 책을 사서 설탕 없이 단맛을 내는 방법을 찾았다. 답은 채소에 있었다. 특정 채소를 식초에 절이면 단맛이 극대화됐다.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한 토스트를 먹은 고객들은 갸웃거렸다. 맛이 깔끔해졌는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비법을 설명하자 놀라면서 이것은 그냥 토스트가 아닌 웰빙토스트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두 번째는 불판을 바꿨다. 이전에는 철판이었다. 철판은 녹이 생겨 지저분했다. 그래서 나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철판도 오래 사용하자 녹이 나고 지저분해졌다. 감사한 것은 내가 용접기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15년간 용접을 하면서 철, 구리, 스테인리스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이 중에 ‘스테인리스 27종’은 녹이 안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비싸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불판 판매업체는 스테인리스 제품을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면 어떠냐고 했더니 팔리지도 않을 것을 왜 만드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직접 도안을 만들어 제조업체에 주문했다. 그 업체 사장도 “다른 사람도 이것을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들어줬는데 버리더라. 당신도 결국에는 버릴 것”이라고 했다. 

돈을 낼 테니 일단 만들어 달라고 했다. 사장은 100만원을 요구했다. 당시 철판은 7만원이었다. 스테인리스 불판으로 토스트를 굽는 연습을 한 달 내내 했다. 낮에는 기존의 철판을 장착해 토스트를 구워 팔고, 일을 마치면 스테인리스판을 올려놓고 토스트를 구웠다. 

스테인리스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불판의 일정한 온도 유지는 맛있는 토스트를 굽는데 필수 요소였다. 온도를 맞추기 위해 유리 온도계를 붙였더니 깨졌다. 나는 레이저 온도계를 사서 수시로 불판에 대지 않고 레이저를 발사해 온도를 측정했다. 그러면서 빵이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온도를 찾아냈고, 불을 줄였다 켰다 하면서 적정 온도를 감으로 유지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하고 연습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더욱 청결해졌을 뿐만 아니라 맛도 달라졌다. 불판이 유리판처럼 반질반질하고 깨끗해지자 사람들이 더 많이 왔다. 또 불판을 바꾼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랬더니 입소문을 퍼뜨렸다. 그때 매출이 크게 올랐다. 한 단계 점프한 시기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11) 성공 1원칙 “내 시간의 진짜 주인공이 되자”


노점상이 안정되자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 치부, 상처 이런 것들이 보였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게으름’이었다. 나는 10시간 이상 자야 만족했다. 성공한 이들은 어떤가 알아봤더니 5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10시간을 못 자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낮에 낮잠을 자서 보충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낮잠도 자지 않았다. ‘나도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성공하려면 잠부터 줄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다. 어느 책에 보니 습관을 바꾸려면 21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21일간 5시간만 자기로 했다. 중간 중간 실패도 있었지만 21일을 지냈다. 이번에는 3개월 동안 5시간만 자기로 했다. 이어 3년에 도전했다. 이렇게 잠자는 습관을 바꿨다. 이렇게 바뀐 습관이 다시 나를 바꿨다.

두 번째로 부끄러운 것은 ‘나만 알았다’는 점이었다. ‘짠돌이’였고 얻어먹기만 했지 베풀 줄 몰랐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노점상을 통해 번 돈에서 우리 집 생계를 해결한 나머지는 이웃에게 베풀자고 결심했다. 

먼저 주변의 보육원을 찾아가 토스트를 구워줬다. 11시쯤 장사를 마친 후에는 서울 사직공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토스트를 나눠드렸다. 노인들은 대부분 혼자 사는 이들로 점심을 걸렀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거나 집까지 가기가 귀찮아 그냥 굶는다고 했다. 굶어도 공원에서 햇볕 쬐며 친구들과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토스트를 만들어 드려도 처음에는 “나 돈 없어”하며 받지 않았다. “돈 받으려는 게 아니에요. 식사하시라고 드리는 거예요”라고 하면 그제야 고마워하며 받았다. 아예 동사무소에 찾아가 도움이 필요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노인 10여명에게 매달 용돈을 드렸다. 그런데 이 용돈을 자녀들이 와서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용돈 대신 계란을 한판씩 선물했다. 용돈을 드릴 때보다 더 많은 이들을 섬길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부끄러운 것은 ‘시간 개념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시간관리를 하자고 결심했다. 하루는 24시간밖에 안 되는데 엉망으로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 관리를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다 시간관리법을 가르치는 곳을 알게 됐다. 한국리더십센터였는데, 프랭클린 플래너를 통해 시간관리 하는 법을 가르쳤다.

핑계겠지만 기계처럼 살까 봐, 써 놓은 것에 억매일까 봐 일정을 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리더십센터에서 효과적이라고 가르치니 따르자고 결심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일과를 미리 정리하는 것만은 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3년을 했다.

지금은 내가 내 시간의 주인공이 됐다. 이전에는 약속을 거절할 줄 몰랐다. 늘 바빴고 시간에 쫓겼다.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시간 안에서 자유로운 나를 발견하고 있다. 소개하면 이런 식이다. 매일 아침 10분 내에 그날 일정을 정리한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일정을 마치면 체크한다. 처음에는 체크된 게 거의 없었다. 며칠 동안 체크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습관이 되니까 안 쓰면 오히려 불편하게 됐다.

일주일이나 한 달 일정도 마찬가지다. 일정을 정리한 뒤 우선순위를 정하고 진행된 것은 체크를 한다. 요즘은 일정 정리를 위한 스마트폰 앱이 많이 있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한두 번 써봤는데, 배터리가 다 되면 볼 수 없었고 잘못 조작하다 저장한 것을 다 날린 적도 있다. 힘들어도 그냥 아날로그 방식의 프랭클린 플래너를 쓰고 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10) ‘이웃에 도움 주는 노점상’ 언론 스포트라이트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운지 몰랐다. 서울신문 사회면에 고객과 약속을 지키는 노점상으로 보도되고 무교동의 토스트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데 성공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부끄러웠다. 처음에는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노점상 ‘석봉 토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SBS의 다큐 ‘세상이 아름다워’의 피디가 방송을 찍자고 했으나 고사했다. 세 번을 찾아왔다. 그래서 내가 방송에 출연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많은 사람이 힘들다며 자살하고 있다. 그런데 노점상이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남들까지 돕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큰 힘을 얻겠느냐”고 했다.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촬영하고 방송에 나갔다. 전국에서 전화가 왔다. “대단하다” “감사하다, 너무 큰 힘이 됐다”등의 내용이었다. 그중에 특별한 분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끊지 마세요”라고 절규하듯이 말했다. 여성이었다. 큰 기업을 운영했던 회장이었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망하고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었고 거의 폐인이 됐다고 했다.

“자살을 두 번 시도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하려는 차에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봤어요. 그리고 노점상을 하는 당신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살아야겠다. 당신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너무 고맙습니다.”

울먹이면서도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했다. 순간 피디가 내가 왜 방송에 출연해야 하는지 설명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앞으로 방송 출연도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다. 이후 이 방송, 저 방송을 탔다. 다큐뿐 아니라 뉴스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 2002년 MBC 11시 뉴스, 2004년 SBS 8시 뉴스가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돕는, 희망과 꿈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는 요지로 나를 소개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라고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찬양이 생각났다. 본의 아니게 그대로 된 것이 꿈만 같았다.

SBS 뉴스는 집에서 식사하며 봤다. 내 이야기인데도 감동했다. 그때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게 됐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가 살아온 과정이 머리를 스쳐 갔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일하러 나가시면서 “거지가 우리 집에 오면 빈손으로 보내지 마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도 감자, 보리쌀 등으로 연명하다시피 살았지만 거지가 오면 있는 것을 나눠줬다. 방송이 나온 날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당시 나는 내게 너무 비관적이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너는 매일 왜 그러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상처받았다. 그날 저녁에는 “너 정말 잘했다, 계속 이렇게 잘 가보자”고 내게 칭찬하고 격려했다.

2004년 KBS2 ‘VJ 특공대’에도 나왔다. 그 방송의 여파도 대단했다. 5시간 동안 일하는 모습,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화장실은 언제 어떻게 가는지까지 다뤘다.

그 고객 이야기도 하고 싶다. 단골손님으로 매일 토스트를 드시러 오셨는데, 몇 개월 만에 노점을 찾았다. 그는 그동안 결혼하고 임신하고 많은 일이 있었다면서 석봉 토스트의 맛을 도저히 잊지 못해 벼르고 별러 남편 출근시키고 왔다고 했다. 나는 토스트 몇 개를 선물로 싸드렸다. 이때부터 고객 만족 서비스에 대해 더 연구하게 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9) “첫 손님에게 판 수익은 무조건 선교 예물로”


노점상이었지만 내게 몇 가지 소소한 원칙이 있었다. 먼저, ‘첫 손님에게 판 수익은 무조건 선교 예물로 드린다.’ 첫 손님이 여러 명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돈을 별도로 모았다가 극동방송에 전파선교기금으로 보냈다.

또 ‘하루 수익의 십일조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한다.’ 이 돈으로는 고아원, 독거노인, 노숙인 등 불우이웃을 도왔다. 이를 통해 내게 있던 거지 근성을 없애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번 돈으로는 생계만 유지하고 적금도 들지 않았다. ‘장사는 오전까지만 한다’는 원칙도 지켰다. 오후에는 주변의 다른 상인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주변 상인들이 처음에는 이 마음을 몰라주더니 나중에는 단골이 됐다. “장사하러 나오느라 항상 아침을 못 먹고 오는데 아침을 챙겨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또 ‘단속반이 와서 자리를 빼라고 하면 무조건 뺀다’도 원칙 중의 하나였다. 이 원칙을 지켰더니 단속반원이 내 편이 됐다. 단속반원이 어느 날 내게 사무실에 들르라고 했다. 갔더니 커피를 타 주면서 “보통 단속을 하면 소리 지르면서 ‘저쪽은 놔두고 나만 갖고 그런다’며 생떼를 쓰는데 당신은 아무 소리 없이 가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했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했더니 “단속을 안 할 수는 없고…”라며 안타까워했다.

청결하고 몸에 좋은 재료만 쓰겠다는 원칙도 있었다. 단속에 걸려 법원에 들락날락할 때였다. 법원은 항상 위생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노점상이지만 청결을 하나의 원칙으로 세우고 굽는 판을 철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교체했고, 건강을 생각해 설탕과 조미료를 없앴는데 위생법 위반이라니….’

나는 또 영어 일어 중국어 등 한 국가마다 20문장을 외워 외국인 고객에게도 토스트를 팔았다. 토스트를 한 개라도 더 팔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국의 토스트를 알리겠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나는 재판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최후진술을 위해 밤새 준비했다. 그리고 재판장에게 “재판장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라고 허락을 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제 노점이 불법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항상 청결하게 유지했고 시청 부근이라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노점상에 대한 인식을 좋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무교동 5대 명물로 인정받고 일본의 가이드북에도 올랐습니다.”

재판장은 이렇게 시작한 내 말을 가로막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5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재판장은 “그래도 노점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청결하려는 원칙과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마음을 잃지 마세요. 그래도 벌금은 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벌금을 4분의 1로 깎아줬다. 그때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미리 고민하고 겁낼 필요 없구나. 정면 돌파도 길이구나.’ 

노점상 연봉 1억 신화로 나는 언론에 여러 번 노출됐다. 첫 번째는 정말 의외의 일로 신문에 났다. 1998년 ‘스포츠서울’의 사회면에 게재됐다. 게릴라성 폭우로 길이 안 보일 정도였지만 그날도 스낵카를 끌고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손님도 거의 없었다. 한 손님이 오더니 “폭우 때문에 사람도 없는데 오늘은 쉬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이 시간에 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고객과의 약속”이라며 “단 한 분이 와도 그분을 위해서 토스트를 팔겠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전화번호를 적어갔다. 그 손님이 서울신문 기자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8) 깡패 행패·단속에도 “한국 최고 노점상 되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점상은 좋은 자리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자리일수록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 보니 훼방꾼이 있고, 주변 상인들의 견제도 상당하다. 그래서 돈 없고 백 없는 노점상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다. 내 뒤에는 돈 많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셨다.

서울 더프라자호텔 인근에서 토스트를 파는 것은 주변 상인들의 방해로 포기했다. 서울시청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이 없었다. 토스트가 잘 팔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종대로 큰길가로 나왔다. 서울파이낸스센터와 서울시청 사이에 스낵카를 댔다. 토스트가 잘 팔렸지만 1주일 후 서울 부시장이 와서 “장사를 하시는 것은 좋은데 시장도, 장관도 이곳을 왔다갔다 하니까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뉴국제호텔과 공사 중이던 서울파이낸스센터 사이에 차를 댔다. 앞에는 코오롱 사무실 건물이 있었다. 이번에는 코오롱 회사의 경비가 정색하며 “여기서 장사하면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조금 후 검은색 세단이 들어왔는데 코오롱 회장이 탄 차 같았다. 난리 칠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1주일을 눈치 보며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코오롱 회사의 한 과장이 오더니 “회장님이 젊은이가 밥 먹고 살려고 하는데 그냥 놔두라고 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장사가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사 중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1주일만 더 해보고 자리를 옮기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오롱 직원 두 명이 토스트를 사면서 ‘이 집 토스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열심히 사 먹을 게요. 우리 회사 직원들 많아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더 버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깡패의 행패, 단속이 문제였다. 구청 단속반이나 경찰에 걸리면 장사도 못 하고 과태료와 벌금만 10만∼20만원 나갔다. 벌금 한 번 내면 장사해봐야 손해였다.

어느 날은 장사를 나가려고 시동을 켰는데 겁이 덜컥 났다. “아빠, 이것 좀 사줘”라고 아이들은 뒤에서 조르는 것 같았고, “얼른 자리 빼세요”라고 단속반은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2시간여를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세요. 음식 솜씨도 좀 주세요.” 이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나는 이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먼저 옷부터 바꿨다. 남대문시장에서 호텔 주방장 옷을 사서 입었다. 이전에는 누더기를 걸쳤다. 없어 보여야 돈이 적게 뜯길 것 같았다. 또 창피하니까 넓은 챙의 모자를 썼다. 이 모자도 벗었다. “이왕 창피 당할 거면 확실히 창피 당하자. 비록 노점상이지만 한국에서 토스트 굽는 프로가 돼 보자”고 결심했다.

주방장 옷을 입었다고 오던 깡패가 안 오는 것은 아니었다. “여긴 원래 내 자린데 감방 갔다 오니까 당신이 있네. 다른 말 않겠어. 내 자리니까 돈 내놔.” 나는 이 문제도 프로답게 대처하자고 생각했다. 방법은 미소였다. 묵묵히 식빵을 구우며 사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욕하고 위협하며 자릿세를 요구했지만 나는 “아, 오늘 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깡패의 태도가 바뀌었다. “형씨 알고 보니 가난한 사람 많이 돕는다며. 원래 여기 내 자리인데, 당신이 그냥 해”라고 했다. 그 뒤부터 이 깡패가 다른 깡패들을 막아줬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
[역경의 열매] 김석봉 (7) ‘토스트 스낵카’ 노점상 사업… 출발과 함께 시련이


아내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남편이 시간 관리를 잘하게 해주세요”였다. 반석성결교회의 금요기도회 때마다 이 기도제목을 내놨다. 나도 나름 전도사였는데, 이런 기도제목을 공개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계획 없이 살았다. 아내의 결혼 조건대로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그뿐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

둘째를 낳기 전 아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 아내는 어린이집 교사로 갔다. 그즈음 나는 고졸 검정고시를 마쳤다. 이어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에 들어갔다. 셋째를 낳았다. 학비와 셋째 양육비 등 돈 쓸데가 많아지자 아내는 학교 근처로 이사해 놀이방을 하겠다고 했다. 상가를 임대했고, 반쪽은 살림집, 반쪽은 놀이방으로 꾸몄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

신학대를 마치자 아내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내밀면서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어요. 다 마쳤으니까 이제 돈을 벌어 우리를 먹여 살리세요. 나는 오늘부터 일을 안 합니다. 곧 쌀도 떨어지고요.” 아내는 놀이방 아이들을 다 돌려보냈다.

200만원으로 시작할 만한 일은 없었다. 웬만한 가게 보증금도 3000만원 이상이었다. 이때 이길우 전도사(현재 반석성결교회 목사)가 “홍대 앞에 토스트 파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더라”고 했다. 홍대 근처 노점상에 가서 토스트를 사 먹으며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동안 사장과 이야기도 하고 멀리서 동향도 살폈다. 토스트를 사다가 내용물이 무엇인지 일일이 핀셋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다른 음식을 파는 노점상도 둘러봤다. 그러면서 마음을 굳혔다. 조그만 차를 마련해서 토스트를 팔자. 새 차는 당연히 비쌌다. 800만원은 줘야 했다. 그러던 중 230만원짜리 폐차 직전의 스낵카를 판다는 신문 광고를 봤다. 차를 사 놓고 2개월간 토스트 만드는 연습을 했다.

노점상은 쉽지 않았다. 자리를 찾는 것부터 문제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야 했고, 지나가면서 사 먹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어떤 곳은 사람은 많은데 그냥 바쁘게 지나갔다. 시청역을 시작으로 웬만한 지하철역 인근은 다 가 봤다. 그러다 녹번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좁은 장소지만 차를 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안됐다. 역 안에 사람은 넘치는데 토스트를 사 먹는 이들은 없었다. 첫날 5000여원을 벌었다. 일주일을 버텼다.

이번에는 홍대입구역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에 3만여원을 벌었다. 재료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다들 출근길에 지하철 타러 가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초를 다투는 출근 시간에는 나도 안 사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하철로 들어가는 곳보다 나오는 곳, 출근이 아닌 퇴근하는 이들이 많은 곳,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곳을 물색했다. 

서울시청 건너편 더 플라자 호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대박이었다. 불티가 났다. 첫날 30분도 안 돼 준비한 재료가 다 팔렸다. 다음날은 재료를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도 2시간도 안 돼 다 팔렸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닥쳤다. “당신 뭐 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어디서 온 거야.” 주변 상인들이었다. 바로 옆 가판대 아주머니는 긴 철사를 들고 와 위협했다. 빨리 치우라고 아우성이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과 파출소에 갔다. 경찰은 “얼굴을 보니까, 선하게 생겼는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처음이니까 오늘은 봐 드려요”라며 가라고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됐다. 호떡 장사 아저씨는 오전 11시에나 문을 열면서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토스트를 파는 내게 와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방해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Comments,     Trackbac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