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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6) 대졸 아내의 결혼 조건 “도와줄테니 검정고시를”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성과 대학을 졸업한 여성의 만남. 영화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만 나왔고,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것은 한참 후였다. 아내는 대전 배재대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보통 영화에서는 첫눈에 반한 고학력자가 상대의 학벌을 무시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아내를 사랑한 나머지 내가 아내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먼저 아내와 장모님에게 감사하고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31세, 그때도 여전히 나는 용접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야간에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측의 무인가 신학교에 다녔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아주 좋게 봤던 것 같다. 하루는 내가 섬기던 반석성결교회 김은호 목사가 좋은 자매가 있으니 만나 보라고 권했다. 지금의 아내였다. 나는 말로만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다. 교회의 유치원에서 아내를 자주 보곤 했지만 여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교회 관인유치원 교사였다. 3개월이 지났다. 김 목사는 또다시 “결혼할 때가 됐으니 마다하지 말고 한 번 만나 보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는 못하고 기도해 보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반석성결교회 김용련 원로목사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잠깐 보자고 했다. 목양실에서 무릎을 꿇고 한참 기도하던 김 원로목사는 “결혼 시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태어나서 자라는 모든 과정을 내가 봐 왔는데 이렇게 준비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매는 내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내였다. 처음에는 두 목사가 상의한 끝에 내게 권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김 원로목사는 일단 기도하고 느낌이 오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며칠이 지났다. 아내가 일하는 유치원의 한 교사가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불렀다. 당사자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며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또 아내였다. 그제야 아내를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위해 준비해 주신 자매가 이 자매입니까?”

아내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펄쩍 뛰었다고 했다. 아내는 내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다고 했다. 사실 어린이전도협회나 신학교를 다니며 알게 된 자매들을 일 때문에 만나곤 했다. 아내는 그것을 본 것이었다. 김 원로목사는 “결혼하면 너한테 정말 잘해 줄 사람”이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이런 상황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솔직히 아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대뜸 “형,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 봤어. 형 처지에 그런 여성이 온다면 대박 아니야?”라고 나를 혼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마주 앉았다. 나는 내 상황을 솔직히 모두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전세는커녕 월세도 못 살고 공장 안에 있는 빈방에서 산다고 했다.

아내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그러면 유치원 옆에 집을 얻어 살자고 했다. 단 하나, 조건이 있었다. 아무리 학벌을 안 따져도 고등학교는 마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도와줄 테니 검정고시를 보라고 했다. 이어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 허락을 구했다. 나는 장모님에게 넙죽 절을 하고 “제게 딸을 허락하신다면 밥은 굶기지 않겠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없지만 제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니 저는 부자입니다. 결혼해서 하나님 나라의 공주로 모시며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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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5) 고된 막노동에도 “성경공부·전도가 내 삶의 길”

서울 마포구 신수동 마포소방서 근처에 내가 20대부터 지금까지 섬기며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어린이전도협회 서서울지회 사무실이 있다. 어린이전도협회는 미국에서 시작한 어린이전도사역단체로 한국에는 1957년에 들어왔다. 현재 전국에 49개 지회가 있고 한 해 평균 어린이 40만명 이상을 전도하고 있다.

나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반석성결교회(이길우 목사) 장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훈련하셨다. 나도 신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모두 인천으로 이사했다. 나는 용접 일을 계속했다. 조선소, 자동차공장, 컨테이너 공장 등에서 용접했다. 막노동도 했다. 매일 고된 일을 반복했지만 그 와중에도 성경을 공부하고 싶었다. 나는 누나가 섬기던 서인천교회(현 선목교회)에 다니면서 청년 대여섯 명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토요일마다 모였다. 성경공부는 7년간 이어졌다. 그러면서 성경을 바라보는 내 눈이 열렸다. 성경을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 함께 한 청년들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지금 각 교회의 장로나 권사가 됐다.

말씀을 공부하면 할수록 전도를 하고 싶었다. 교회는 각 가정을 방문해 문틈에 주보를 꽂아 놓는 식으로 전도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나는 교회 전도사에게 전도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 전도사는 내게 한국어린이전도협회를 소개했다. 전도에 대한 내 열정을 바로 봤던 것 같다. 나는 협회에 소속된 청년 7명과 한 팀을 이뤘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어린이들을 전도했다. 소속 교회도 소속 교단도 달랐지만 인천에 사는 어린이는 한 명도 빠짐없이 복음을 듣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전도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하기 위해 재미있는 그림책도 개발했다.

인천 주안에 있던 시민회관(현 옛시민회관 쉼터)을 빌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전도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대관비를 마련하고 지역 아이들 3000여명을 초청했다. 인형극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했다. 또 이렇게 알게 된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말씀으로 양육했다. 

거주지를 서울로 옮겼다. 공장에 취직했고 막일을 했다. 배운 게 없어 하는 일은 비슷했다. 나는 항상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았다. 월급도 안 올랐고 승진은 꿈도 못 꿨다.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신학을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당시 다닌 교회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반석성결교회다. 현재는 역촌동으로 이전했다. 나는 고 김용련 원로목사를 만나 상의하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측의 무인가 신학교에 입학했다.

김 원로목사는 내게 특별한 분이다. 나의 영적인 멘토일 뿐만 아니라 나와 아내를 연결해 준 분이다. 아내도 이 교회를 섬겼다.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전공한 아내는 이 교회의 관인유치원인 반석유치원 교사였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그래서 가끔 일로 만나곤 했다. 유치원의 이런저런 것을 고쳐야 할 때 아내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유치원 아이들 사진도 내가 찍어줬다. 그러면서 친해졌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교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이지만 아내는 대졸 출신이었다. 학벌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학벌을 놓고 볼 때 우린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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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4) 예수 영접한 아버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 육신의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형제들은 3일간 금식했다. 아버지는 눈을 뜨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시다 3개월 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전도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전도하라고 했다. 그것이 효도라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고 일단 열심히 기도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선생님은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전도는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 나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말을 하기로 정한 그날 나는 아침과 점심을 금식했다. 작전도 세웠다. ‘저녁식사 중에 말을 꺼내자. 한마디만 하자. 아버지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가요.’ 칼국수를 먹었는데 처음에는 입이 안 떨어졌다. ‘그래 30번 세고 말하자. 그래 50번 세고 말하자. 100번만 세고 말하자’며 스스로 독려했다. ‘그래 순교는 아주 복되다는데 내가 전도하다 아버지에게 맞아 죽으면 그것도 복이겠지’라고 위로도 했다.

그리고 큰마음 먹고 “아버지, 예수 믿고 천국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순교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은 ‘형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주변이 조용했다. 폭풍전야였다. ‘밖으로 나를 집어던지실까,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실까, 몽둥이찜질로 이어질까’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집 빚을 다 갚으면 엄마하고 같이 갈게.” 기적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하나님, 그 빚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빨리 갚아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아버지는 이후 7년이 지나서야 교회를 가셨다. 빚을 갚아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아버지가 며칠 못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굿을 했고, 절에 가서 불공을 했다. 절망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큰누나가 말했다. “지옥 가면 고생하고 너무 힘들대. 엄마, 우리 아버지 모시고 교회 한번 갑시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이 시무하던 서대문교회에 갔다. 생애 첫 예배를 드린 아버지는 “여기가 천국이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몇 달 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 큰누나,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처럼 꾸며 택시를 탔다. 어머니는 수술도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래도 수술은 한번 받게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겼다. 우리는 전북 정읍으로 가는 길에 전주예수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큰형이 공연히 난리를 피웠다. 우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큰누나는 먼저 인근 교회의 전도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또 앞으로 3일간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기도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때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눈을 뜨셨다. 가족들은 모두 방언이 터졌다. 아버지가 눈을 뜨자 큰누나는 “아버지, 일어나세요. 기뻐하며 찬양합시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집안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때 도망가지 않고 남은 당숙에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네. 동생, 누가 뭐래도 예수님 잘 믿게.”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3개월을 더 사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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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3) 제삿날 덥석 무릎 꿇고 기도하자 온 집안 ‘발칵’


독실한 불교 집안을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거듭나게 한 이는 큰누나였다. 누나는 돈을 벌려고 도시에 나갔다가 복음을 접했다. 가끔 집에 들러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 어른들이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들은 건드리지 마라.” 그렇다고 동생들을 가만히 놔둘 누나가 아니었다. 큰누나는 가족 중에 가장 먼저 나를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데려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바로 윗동네에 사는 큰집 어른들이 쫓아왔다. 집안이 망한다는 둥, 동생을 망쳤다는 둥,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정작 누나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내 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교회에서 들은 지옥 이야기가 너무나 무서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친인척 중에는 주지 승려가 있었고 어머니는 보살이었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대웅전에 올려놓고 좋은 승려를 만들겠다고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나는 극락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극락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국에 가고 싶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손가락만한 구더기가 몸을 뒤덮고 파먹는다는 이야기는 끔찍했다. 생생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구더기였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이것이 가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1년간 교회에 다니면서 집요하게 질문했다. 왜 부처가 아닌 예수만 믿어야 천국에 가는지 등의 의문점을 물고 늘어졌다. 어른들이 모이는 구역예배에도 참석해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것은 다 물었다. 그러면서 확신이 들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부모님을 전도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탄이 방해했다. 아버지는 내가 주일에 교회에 못 가게 밭일을 맡겼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일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맡은 일을 하다가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면 몰래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리 집의 반대는 그런대로 무시할 수 있었다. 문제는 큰집의 반대였다. 큰집은 딸만 있었기 때문에 나를 양자로 삼았다. 대를 이을 장손이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은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더더욱 반대했다. 제사를 주도해야 할 장손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앞으로 제사상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나는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로 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이후에 많이 자책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삿날이 다가왔다. 결심은 했지만 절을 안 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는데 큰아버지가 “석봉아, 인사드려라”라고 준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절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서 있는 편을 택했다. 선 채로 호되게 야단맞고 그날은 지나갔다. 

또 다른 제삿날이 왔다. 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버렸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큰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놔둬라. 이미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니 제삿밥 얻어먹기는 틀렸다.” 그 다음부터는 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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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2) 가난한 열네살 소년 “아이스케키 사세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3개월 가까이 울었다. 결국 일을 배우기로 했다. ‘기술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려다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기술자 밑에서 ‘시다바리(조수)’를 하다 얻어맞기만 했다. 초등학교만 나온 14세 청소년이 겪는 사회생활은 밑바닥 순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을 따라 경기도 성남으로 갔다. 형님이 일하러 가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2주 동안 연습한 것 같다. “아이스케키, 5원에 얼음과자 2개.” 돈도 벌어 좋았지만 아이스케키 가게에서 주는 비빔국수가 아주 좋았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비 오는 날은 장사하기 가장 나쁜 날이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기도 전에 녹아서 흘러내렸다. 우리는 안 녹은 것처럼 보이려고 빨아 먹어 가며 아이스케키를 사라고 외쳤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술을 배워야지 밥 먹고 산다”며 나를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 넣었다.

요즘은 자동차정비 학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기술자 밑에서 배웠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혹독하게 다뤘다. 정비공장에는 내 또래가 다섯 명 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공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잘못 가져오면 그 공구를 사람에게 던졌다. 바닥에 던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던졌다. 사람을 맞췄다.

저녁에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면 온몸이 파랬다. 다들 똑같았다. 멍이 든 몸을 서로 보며 서러워 울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군말 없이 일했다. 월급은 없었다. 그저 비누 값 정도만 받았다. 우리가 아니어도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 일과를 끝내고 청소를 할 때였다. 카바이드(탄화칼슘 덩어리)로 용접을 한 이후에는 카바이드 용접기 통을 비우고 깨끗이 닦아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 통을 청소하다가 그날 배수구가 막혔다. 카바이드 찌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이 역류해 바닥이 엉망이 됐다. 이를 알게 된 공장장은 “니들 다 죽었어”라고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변에 있는 공구들을 던졌다. 쇠뭉치가 달린 고무호스도 휘둘렀다. 또래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나만 얼떨결에 남았다. 그리고 그 호스에 등을 맞았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죽은 것처럼 바닥에 뻗었다. 공장장은 그런 나를 발로 밟았다. 나는 살겠다고 몸을 움직여 자동차 밑으로 피했다. 이어 화장실로 숨었다. 그날 도대체 어떻게 집에 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1시간 이내의 거리를 거의 서너 시간 걸려 기어갔던 것 같다. 이를 안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경찰서에 가서 공장장을 고소했다. 공장장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공장장은 이튿날 멀쩡하게 출근했다. 알고 봤더니 공장장의 형님이 경찰서장이었다. 결국 내가 정비공장을 그만뒀다.

소득은 있었다. 1년 반 정도 있으면서 산소용접 기술을 배웠다. 나는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가서 세차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혹사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임은 내가 교회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교회에 갔다 오면 긴 용접봉으로 나를 많이 때렸다. 그나마 사장님은 나를 잘 봤다. 어린애가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 것 같다. 나 먹으라고 생선을 사서 끓여주곤 했다. 그러나 그 세차장도 선임기술자 때문에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때 다닌 교회가 인천 숭의감리교회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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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토스트 노점상' 창업 3년만에 연 매출 1억원을


내가 ‘노점상 연봉 1억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누가 뭐래도 아내 하영숙(55) 덕분이다. 1997년 내가 경기도 안양 성결대 목회학과를 졸업했을 때 아내는 “공부를 마쳤으면 이제 돈을 벌어오라”고 내 어깨를 떠밀었다. 교육전도사로 받는 사례 10여만원 말고 진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아내는 “오늘부터 나는 일을 안 할 거야. 1주일 후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져”라고 잘라 말했다.


그때까지 가정경제는 아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과 용접 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결혼 전에는 유치원 교사를 했고, 결혼 후에는 돈 없는 나를 대신해 놀이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다.

아내는 돌보던 아이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하나 내밀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2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중고 스낵카를 사서 토스트를 팔기 시작했다.

경험은 없었다. 노점상은 그 자체 불법이었다. 경쟁업체라고 할 수 있는 주변 상인들과 거리의 깡패들도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당시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주문받고 계산하고 토스트를 구워서 건네는 모든 과정이 모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해야 하는 일인데도 내겐 너무 어려웠다. 그만큼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노점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연간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주식회사 석봉토스트를 세워 대표이사가 됐고 지금까지 전국에 가맹점 300여개를 냈다. 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에도 입점했다. 기업체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중소기업청 지정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를 지냈다. 

아내와 함께 지금의 내가 있도록 만든 분은 소천하신 반석성결교회 김용련 원로목사다. 김 원로목사는 나의 영적인 멘토셨다. 아내와 김 원로목사를 만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김석봉을 만드신 이는 물론 하나님이시다. 나는 사업가가 안 됐다면 목회자가 됐을 것이다. 

사업으로 승승장구할 때 나는 이제 사업을 접고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이제 사업을 그만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은근히 기대하며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목회가 아닌 사업을 하라는 확신을 주셨다. 이후 나는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전북 정읍 내장산 기슭에서 8남매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1950∼60년대에는 어렵지 않은 가정이 드물었지만 우리 집은 더 어려웠다. 방 한 칸짜리 초가집에 열 식구가 살았다. 농지는 없었다. 산을 개간해 고구마를 심었고 겨우내 고구마만 먹었다. 고구마도 떨어지면 정부에서 지원받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밀가루를 담았던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신발도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표현해 ‘절망’ 그 자체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58년생. 전북 정읍 내장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거쳐 91년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 졸업. 97년 노점 ‘석봉토스트’ 창업, 2005년 국제코스타 강사, 2009년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2011년 중소기업청장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 역임. 현 ㈜석봉토스트 대표, 극동방송 운영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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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보육원생 137명의 아주 특별한 성탄 쇼핑


평범한 가정의 일상이 소원인 아이들이 있다. 대형마트에 가서 쇼핑 카트를 끌며 과자와 옷, 장난감을 사고 식료품 코너에서 시식을 하는 일이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평생소원 중 하나다. 

전북 군산 남군산교회(이종기 목사)는 지난 19일 오후 6시 삼성애육원 군산일맥원 등의 보육원생 137명을 이마트 군산점으로 초청했다. 아이들에게는 1인당 5만원짜리 상품권을 한 장씩 지급했다. 

중·고생 아이들은 2∼3명씩 짝을 이뤄 카트를 끌었다. “어느 코너부터 갈까”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카트의 손잡이를 쥔 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말을 꺼낸 아이도 부리나케 뒤따랐다.

초등학생들은 보육원 선생님들이 데리고 다녔다. 하성우(9·가명)군은 껌 한 통과 바나나 우유 한 묶음을 카트에 집어넣더니 선생님에게 “이제 얼마 남았어요?”라고 물었다. 옆에 있던 아이는 선뜻 물건을 고르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들과 동행한 남군산교회 성도 박종석(55)씨는 “성탄절을 앞두고 마트에 간다고 공지하면 한 달 전부터 사고 싶은 것을 썼다 지웠다 한다”면서 “그 목록을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북적였던 곳은 옷 코너였다. 2만∼3만원으로 살 수 있는 후드 티, 라운드 티 등이 인기였다. 여중생들은 스킨, 로션, 폼 클렌저 등 화장품을 많이 샀다. 카트를 끌고 속옷과 책 코너를 왔다 갔다 하던 서형석(13·가명)군은 “후드 티 2만9900원, 양말 9900원어치를 샀는데 나머지 돈으로 내의를 살까, 책을 살까 고민 중”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쇼핑카트에 탄 태연(6·가명)이는 더 신났다. 보육원 김형숙(40·여) 선생님이 따뜻한 티셔츠를 보여주며 “태연아, 이거 어때”라고 묻자 “예뻐요, 빨리 그거 사고, 장난감 판매대로 가요. 야호!”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환호성이 이마트 안에 길게 여운을 남겼다. 

남군산교회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소중한 일상을 선물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교회에서 음식을 대접받은 한 보육원생이 “부모 있는 아이들처럼 대형마트에서 쇼핑카트를 밀며 쇼핑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감사편지를 적어 보냈던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밑에서 자란 이종기 목사는 이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었기에 가슴이 아팠다. 

남군산교회 사회봉사연구 사역위원회는 그해부터 마트 쇼핑이라는 성탄선물을 마련했다. 남군산교회에선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위원회가 기획과 진행, 마무리, 평가까지 모든 사역을 주관한다. 예배연구 사역위원회 등 위원회만 25개다.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사역은 사회봉사연구 사역위원회가 맡고 있다.

남군산교회는 지역 내 모든 보육원 아이들을 초청해 외식을 하는 행사도 갖는다. 2004년부터 5월 가정의 달과 11월 추수감사절 등 해마다 두 차례 아이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 목사는 “행사를 거듭하면서 아이들도 자신감을 많이 회복해 어디 가서나 당당하게 행동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처음 외식을 할 때는 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었지만 지금은 ‘고기 더 주세요, 밑반찬 더 주세요’ 등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처음 뷔페에 갔을 땐 우르르 몰려다니며 허겁지겁 먹었지만 이제는 제법 여유로워졌다.

남군산교회는 1988년부터 보육원 아이들을 돌봐왔다. 처음에는 5명의 원생들에게 매달 용돈을 주고 1년에 두 차례 외식을 시켜주며 옷을 사줬다. 1995년부터는 한 곳의 보육원을 정해 1년에 한 번씩 모든 아이에게 옷을 사줬다. 2004년부턴 지역의 모든 보육원으로 지원을 확대했다.

여기에는 평신도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인 교회는 교단 내에서 1인당 연간 헌금 총액(280여만원)이 가장 많은 교회로 꼽힐 정도로 평신도들의 헌신도가 높다. 1983년 30명으로 개척한 교회는 현재 장년 성도 820여명 규모로 성장했다.

군산=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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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 사랑의 음악회

자폐와 지적 장애 등을 가진 발달장애인들이 성탄절을 맞아 16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 CTS아트홀에서 ‘사랑의 음악회’를 열었다. 음악회는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국장협·이사장 최공열 장로)가 운영하는 장애인문화예술학교 학생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문화예술 활동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정기연주회다. 

이들은 객석과 상관없이 스스로 무대를 즐겼고 객석도 이들의 실력과 상관없이 호응하고 박수로 격려했다. 첫 무대는 전북 완주학교의 ‘웃다리사물놀이’팀이 장식했다. 이들은 북과 장구로 ‘임실필봉농악’을 연주했다. 박자를 놓친 한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연주에 합류했다. 하지만 본인도 동료도 관객도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연주하고 관객들은 흐뭇한 미소로 지켜봤다.

경기도 용인 예빛학교의 난타팀은 ‘독도는 우리땅’을 연주했다. 이들은 노래에 맞춰 힘있게 북을 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강조했다. 전북 정읍학교의 밴드는 분위기를 돋웠다. 이들은 ‘나성에 가면’ ‘개구쟁이’ 등 빠른 곡들을 연속해서 불렀다. 미리 공지한 2곡이 끝나자 한 싱어가 “앵콜 안 해요?”라고 물었다. 객석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클라이맥스는 인천 참빛학교의 난타와 서울학교의 창작무용 공연이었다. 참빛학교 학생 20여명은 경쾌하고 빠른 연주로 객석을 압도했다. 또 서울학교의 하늘나무 무용단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자연숲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새 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진 곡에 맞춰 춤을 췄다. 

이후에는 클래식 무대가 이어졌다. 경기도 강화학교의 강화앙상블이 ‘나뭇잎배’ ‘타이거 인 더 나잇’ 등을, 서울학교의 체임버 앙상블이 ‘장식하세’ ‘아리랑 환상곡’ 등을 연주했다.

서울예빛학교에서 핸드벨을 가르쳐온 발달장애인 고지혜(34·여)씨는 “아이들이 7년간 연습한 무대”라며 “저곳에 서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다. 최공열 이사장은 “장애인이 문화예술을 통해 스스로 삶을 표현하고, 기쁨을 나누는 자리”라며 “장애인들끼리 혹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소통하는 장”이라고 강조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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