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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독일 예나大와 학술교류 협정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는 지난달 독일에서 예나대학교(총장 발터 로젠탈)와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했다고 11일 밝혔다. 서울신대는 지난해 7월 튀빙겐대와도 학술 및 학생 교류를 위한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예나대와 튀빙겐대는 하이델베르크대와 함께 독일 3대 명문대로 꼽힌다.

1558년에 설립된 예나대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9세기 전후에는 독일 문호 프리드리히 실러를 비롯해 철학자 피히테, 헤겔 등이 교수였다. 국내에선 안호상 초대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이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독일 통일 이후 예나대 부속 ‘화해연구소’가 큰 주목을 받았다. 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갈등에 대해 신학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 협정 체결에는 유 총장과 튀빙겐대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라르틴 라이너 화해연구소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협정에 따라 서울신대와 예나대는 4월 3일 경기도 부천 서울신대에서 열리는 ‘통일과 화해를 위한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키로 했다.  

유 총장은 협정식에서 “평화와 화해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서울신대와 예나대가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 지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함께 연구하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발터 로젠탈 총장은 “서울신대와 함께 한국 기독교가 한반도 통일과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신대는 글로벌 인재 양성과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일본 도시샤대, 중국 지린사범대, 미국 아주사퍼시픽대 등 세계 유수 대학들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는 등 외연을 넓히고 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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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홀트아동복지회, 미혼모 지원 협약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총회장 이신웅 목사)는 최근 홀트아동복지회와 미혼모 지원을 위한 사회공헌 협약식을 열었다고 11일 밝혔다(사진). 이에 따라 기성은 본부 차원에서 교단 소속 교회들이 미혼모 사업과 후원에 적극 동참할 수 있도록 독려할 예정이다. 

홀트아동복지회는 미혼모 지원사업인 ‘꿋꿋(good good)한 엄마’와 ‘캥거루스토어’를 진행하고 있다. 꿋꿋한 엄마는 생후 36개월 미만의 아동을 양육하고 있는 미혼모 가정에 10개월 동안 매달 2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캥거루스토어는 ‘아름다운 가게’와 같이 나눔을 위한 가게를 마련하고 미혼모를 고용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으로 오는 4월 경기도 수원에 1호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협약식에는 이신웅 총회장, 고순화 장로 부총회장, 김대열 홀트아동복지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 총회장은 “앞으로 교단 차원에서 이들이 자립하는데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번 협약식이 한국교회가 미혼모들을 돕는데 촉매제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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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20 ·끝) 세상에 꿈과 희망 주는 토스트를 굽겠습니다


한국어린이전도협회와 극동방송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체다. 어린이전도협회는 1937년 미국에서 창설돼 전 세계 19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사역단체다. 이곳은 1980년대 내가 섬기던 서인천교회(현 선목교회) 전도사가 소개하면서 알게 됐다. 지금 나는 어린이전도협회 서서울지회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어린이 전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릴 때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어야 커서라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 매스컴의 발달로 아이들이 복음을 쉽게 접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매스컴에는 복음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 아이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또 대부분의 아이가 학원에 가 있어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니 전도가 어렵다. 세상이 흉악해진 것도 전도를 어렵게 하는 요소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경계한다. 이렇게 전도가 어려운데도 협회는 오직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전도자들을 훈련하고 실제 전도에 나서고 있다.

극동방송은 청취자에서 후원자로, 지금은 운영 부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고 김용련 반석성결교회 원로목사님이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찬양을 들어야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며 극동방송 청취를 적극 추천했다. 실제 극동방송을 통해 믿음이 성장했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또 ‘극동PK장학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극동PK장학재단은 김장환 목사를 미국으로 유학 보낸 한국전 참전용사 파워스 상사와 김 목사의 영문 첫 이니셜 ‘P’와 ‘K’를 따 만든 장학재단이다. 김 목사가 그동안 받지 않은 사례비를 모아 만들었고 1년에 한 5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나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가깝게는 2년 안에 직영매장을 내는 것이다. 직접 유니폼을 입고 토스트를 굽고 서비스를 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 석봉토스트를 경영하는 것보다 좋았다. 그 행복을 되찾고 싶다. 직영매장 옆에는 연구실과 응접실을 만들어 제품을 연구하고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과 삶을 나누고 싶다. 아카데미도 만들려고 한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대학생들에게는 시간 관리, 경영 등을, 빵 굽는 기술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기술도 가르쳐주고 싶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잘못이다’라는 빌 게이츠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앞으로는 가난했던 지난 삶에 연연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미래에 투자할 것이다. 멀리는 석봉토스트를 해외에 수출할 계획이다. 한국에 바른 먹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버는 수입으로는 국내에 330만여㎡(100만평) 규모의 청소년캠프장을 지을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심어주고 비전을 세우도록 도울 생각이다. 

신앙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업을 시작했던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비문에 ‘한국인답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면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사람, 이곳에 잠들다’라고 쓰였으면 좋겠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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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9) 한인디아스포라와 유학생 섬기는 코스타 강사로


기업체 특강 강사로 주가를 올리던 나는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코스타) 강사로까지 활약하게 됐다. 코스타는 30여년 전 홍정길 이동원 목사 등이 한인디아스포라와 유학생을 위해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이다. 

코스타 강사들은 사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 돈을 들여 강의하러 왔다. 또 모든 일정을 참가자들과 함께 하며 은혜를 받았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큰 도전을 받았다.

코스타와의 인연은 강원도의 한 호텔에서 시작됐다. 이랜드 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마쳤을 때 당시 코스타 상임총무 곽수광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강연이 아주 좋았다면서 그해 5월 필리핀에서 열리는 코스타대회의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코스타에 대해 전혀 몰랐다. 곽 목사는 코스타의 시작부터 당시 활동 상황까지 한참을 설명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9년 전 이야기다. 필리핀의 코스타 대회는 장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향한 청년들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예수님을 소개하려는 강사들의 열의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청년들은 1년 동안 코스타 대회만 기다린다고 했다.  

강사는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홍정길 이동원 목사, 송정미 사모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섬겼다. 사실 이런 인사들이 강사료를 받고 강연을 한다면 코스타 대회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터였다. 이들을 강사로 모시려면 웬만한 액수로는 어림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코스타 대회 내내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강연 순서가 끝났다고 먼저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이들도 참석한 청년들이 입은 티셔츠를 똑같이 입고 청중 맨 앞자리에 앉아 강연을 경청했다. 모두 대회 시작 전에 도착해 끝날 때까지 청년, 스태프들과 함께 했다.  

사실 강의를 하러 왔다기보다 은혜를 나누러 왔고, 가르치러 왔다기보다 본을 보이러 왔다. 이들은 무대에 서기도 하고 무대 아래에서 청중이 되기도 했지만 한결같이 섬기는 모습이었다. 또 청년들에게 도전을 줄 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이곳을 통해 도전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코스타 강연을 위해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휴가를 내서 오기도 했다. 나는 코스타를 통해 큰 도전을 받았다. 코스타에 갈 때마다 회개하고 통곡하고 기도하고 비전을 새롭게 했다. 반면 청년들은 코스타를 통해 말씀으로 세워지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들의 역할을 찾았다. 이들 중에는 갖가지 가정 문제로 외국에 방치된 아이들도 있었다. 또 힘겨운 유학생활로 탈진한 이들도 있었다. 

청년들은 한국의 유명 강사들을 직접 보며 처음에는 ‘이런 분들을 내가 직접 만나다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청년들은 강사들이 아니라 강사들이 소개하는 예수님을 만난다. 그러면서 회복되고 헌신을 다짐하고 비전을 세워나간다.  

코스타 대회에 처음 참석한 나는 큰 감동을 받고 불러주기만 한다면 매년 강사로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어떤 해는 코스타 대회에 4번 참석해 강연하기도 했다. 덕분에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캐나다 등 많은 나라를 다녔다. 지금까지 대략 10회가량 코스타 대회에서 강연했다. 

나의 강연 주제는 ‘인생을 바꾸는 습관’ ‘하나님 자녀가 가져야 할 비전과 꿈’ ‘인생은 시간관리다’등이었다. 나는 코스타 대회에 강사로 참석하면서 석봉토스트의 해외 진출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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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8) “노점상의 기적을 배우자” 삼성그룹 특강 요청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무교동 석봉토스트 스낵카를 철수한 이후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강의다. 주식회사 석봉토스트 대표로 경영하는 것 외에는 주로 특강을 하고 있다. 나름 잘나가는 강사다. 전문 교육도 받았다. 명강사라는 호칭도 얻었다. 
 
첫 강의는 삼성그룹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무교동에서 토스트를 팔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삼성입니다. 과장 승진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강의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삼성, 그 삼성 말인가요?”라고 물었다. “네, 그 삼성 맞습니다. 차를 보내드릴 테니 주소를 부탁합니다.” 나는 약속된 날에 삼성 연수원인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창조관으로 갔다. 2시간 동안 그간의 삶과 무교동에서 토스트를 굽기 시작해 나름 성공하게 된 이야기를 강연했다. 반응이 좋았던지 다음에 또 불렀다. 이번에는 주임 승진자를 대상으로 했다. 다음에는 신입사원이 대상이었다. 삼성은 강의 평가를 해서 90점 이상을 못 받으면 다시 부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있었다. 내가 적어도 90점 이상은 얻은 것이었다. 

욕심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강의하는지 궁금했다. 강의를 끝내고 다른 강사의 강의를 청강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파워포인트를 사용했다. 내가 열 마디, 스무 마디 할 내용을 파워포인트 한 장으로 설명했다. 나도 컴퓨터를 샀다. 중학교 아들의 도움을 얻어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에 설치하고 파워포인트를 만들었다. 물론 엉망이었다. 

나는 강연자료 만드는 법, 강연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곳은 없는지 알아봤다. 한국강사협회라는 곳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리고 강의에 대해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더 욕심을 냈다. 마침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 최고 명강사 과정이 생겼다. 나는 1기로 입학해 한 학기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 국내 파워포인트의 대가로 알려진 한국강사협회 초대회장 안병재 주임교수를 알게 됐다. 나는 현재 최고 명강사 과정 동문 총회장을 맡고 있다. 

내가 고민했던 것, 원했던 것이 이 과정 안에 다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나를 초청하는 회사가 원하는 대로 내용을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이야기를 통해 감동할 정도였다. 강의 때 쓰는 말투도 바꿨다. 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중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한국강사협회는 매년 분기별로 강사를 평가한다. 나도 명강사로 불리는 이들, 강사협회 임원, 각 유명기업의 연수원장 앞에서 60분간 강의했다. 떨리다 못해 두려운 자리였지만 내 연설이 감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평가 이후 2009년 명강사 95호 위촉패를 받았다. 나도 명강사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2011년에는 한국HRD(인적자원개발)협회에서 강사 부문 대상을 받았다. 2013년엔 ㈔한국신지식인협회에서 역시 강사 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중소기업, 대기업, 정부 부처, 국회, 초·중·고교, 대학교, 삼성의료원 등에서 강의를 요청했다. 강의 내용은 성공 노하우, 인생을 바꾸는 작은 습관, 가슴을 뛰게 디자인해라, 시간관리 노하우 등이다. 강의 방법 중 내가 중시하는 것은 ‘첫째, 메시지를 분명하게 정하라’ ‘둘째, 웃음을 곁들여라’ ‘셋째 감동을 전달하라’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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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7) 프랜차이즈 사업 반년 만에 가맹점 100여개로



2004년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체인점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척척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쉬운 사업은 없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됐는데 남는 장사를 하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초기 자본이 필요했다. 당장 사무실이 필요했다. 상담도 해야 했고 업무용 책상도 놔야 했고 교육도 해야 했다. 시간을 아끼려면 사무실은 무교동 스낵카 근처에 있어야 했다. 

무교동의 임대료는 비쌌다. 이런저런 것을 따져 보니 최소한 1억원이 필요했다. 생계만 유지하고 남는 돈은 이웃을 위해 썼기 때문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행이 노점상에게 대출해줄 리도 만무했다. 지인 중 한 분이 석봉토스트를 믿고 투자했다. 무교동에 사무실을 냈다. 

나는 오전에는 스낵카에서,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했다. 사무실에서는 사업설명회를 하고, 가맹계약을 맺으면 교육을 했다. 재료 준비하는 과정, 토스트 굽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체인점에 재료도 공급했다. 나는 좋은 재료만 고집했다. 특히 치즈 햄 등은 유명 브랜드 제품만 썼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그래야 식중독 등 문제가 생기면 해당 기업이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기업 제품을 대량 구매하고자 했다. 대기업을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다. 제품을 정기적으로 납품해 달라고 하자 담당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도매상 제품을 체인점에 납품했다. 나중에 석봉토스트가 더 유명해지자 그 대기업 담당자가 석봉토스트에 제품을 납품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스낵카는 0.8t트럭을 개조했고 석봉토스트 로고를 붙였다. 여름에는 모기장을, 겨울에는 방풍비닐을 설치했다. 트럭 개조 등 전문적인 부분은 업체에 맡겼지만 대부분 내가 했다. 밤새는 일도 많았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여섯 달 동안 체인점을 100여개로 확장했다. 2004년 8월 가맹사업을 시작해 2005년 3월 즈음 투자받은 돈 1억원을 다 갚았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체인점을 낼 때 받는 가맹비 노하우비 등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돈이 없어 노점상을 하려는 이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트럭을 스낵카로 개조하고 빵 굽는 시설을 설치하는 데 따른 시설비가 약간 남았다. 가맹비 등을 받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가게 10평 기준으로 4000만∼5000만원만 있으면 석봉토스트를 낼 수 있다. 

나는 체인점만 내주는 게 아니고 오픈기념 이벤트도 해줬다. 새로운 체인점에서 직접 토스트를 구워주며 손님들과 덕담을 나눴다. 나름 유명했기 때문에 손님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그즈음 무교동의 석봉토스트는 접었다.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의 노점상들이 모두 없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노점을 접었다. 

외국인을 위한 관광가이드북에도 소개됐는데, 내가 장사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무교동의 석봉토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지금 같으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자고 했을 텐데 말이다. 사무실도 무교동에서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옮겼다. 현재 사무실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다. 가맹비도 안 받으면서 유지하기에는 무교동의 사무실 임대료는 너무 비쌌다. 가맹점은 많이 냈지만 금전적인 것만 생각하면 실속은 없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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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6) 갑작스런 위암 판정… “주님 살려주세요” 기도


2002년 한국 축구가 4강에 진출해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우리 집은 당시 첫째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가 5학년, 셋째가 유치원, 넷째가 임신 8개월이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를 계속 다뤘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연간 1억을 버는 사나이, 토스트맨’. 하지만 나는 병들어 있었다. 위암이라고 했다.

연간 1억원을 벌었지만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집의 크기도 늘리지 못했다. 스낵카 말고 차도 없었다. 통장에 만원 한 장 없었다. 벌어서 생계만 유지하면 남는 것은 다 이웃을 위해 썼기 때문이었다. 

“위암, 악성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서는 다섯 시간 정도 밖을 헤맸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위암이래. 빨리 수술하면 고칠 수 있대.” 

그날 밤은 꼬박 새웠다. “죽으면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아이들은 고아원에 갈 텐데.”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내도 잠을 자지 못했다. 서로 등을 대고 누워, 눈물만 닦았다. 아내가 두 마디 했다. “혼자 죽지 마. 나 두고 혼자 떠나지 마.” 나는 속으로 외쳤다. “하나님, 보셨죠. 아내의 이야기 들으셨죠.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어떻게든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는 수술대에 올라 위의 75%를 잘라냈다. 의사는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번졌다며 하루에 여섯 끼 식사를 하고 항암제를 세 번 투여해야 한다고 했다. 4∼5년은 쉬라면서 재발하면 희망이 없다고 했다.  

수술도 수술이지만 버티는 것이 더 힘들었다. 정해진 양보다 쌀 한 톨만 더 먹어도 위에서 난리가 났다. 위급상황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내가 수술하고 누워 있는데 아내도 누워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넷째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통장은 비어 있지, 애들은 다 어리지, 형제가 있었지만 누구 하나 도움을 줄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수술 후 6개월이 지났다. 돈이 없어 그냥 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차피 죽을 것이면 일하다 죽자. 아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남겨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나가기로 했다. 

“나는 토스트를 다시 굽겠다.” 나는 날마다 새벽 5시에 화장실에 기어가다시피 들어가 이렇게 세 번씩 외쳤다. 또 “나는 살아있어 기뻐. 나는 일하느라 바빠. 내 얼굴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니까 나는 예뻐”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 보면 내가 이렇게 외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또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석봉아 너는 할 수 있어. 너라면 해낼 거야. 너는 꼭 해내고 말 거야.”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줬다. 기도도 했다. “하나님 저 지금 다리가 휘청거려 서 있기도 힘들어요. 하지만 저는 일 나갈 겁니다.” 실제 3주를 그렇게 외치고 차를 끌고 일을 나갔다.

항암제는 정말 독했다. 약 기운 때문에 일하다 쓰러지기도 했고 손님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왔는지 모른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스낵카에 있는 것조차 몰랐다. 몸이 너무 힘들어 집에 가다가 2시간여를 차 속에 누워 있기도 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했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더는 나가지 말라고 할 게 뻔했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그러면서 기적을 맛봤다. 항암치료가 끝났을 때 의사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세 가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첫째, 머리가 빠질 수 있습니다. 둘째, 살이 안 찔 겁니다. 셋째, 얼굴이 까매집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모두 거꾸로 됐다. 머리는 더 났고 얼굴은 하얘졌고 살도 올랐다. 

죽다 살아난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고백과 지난날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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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5) 줄잇는 손님들… 장사 설렘으로 밤잠 설쳐


2000년 즈음 오전 6시부터 5시간 동안 토스트 300여개를 팔았다. 석봉토스트의 토스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났고, 석봉토스트가 희망을 굽는 토스트맨으로 언론에 소개되면서 손님이 줄을 섰다. 나는 토스트 노점상의 프로가 되기 위해, 최고의 서비스를 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랬더니 체인점까지 내게 됐다.

나는 손님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몇 년 일하다 보니 눈썰미도 생겼다. 하루에 300명 안팎의 손님이 왔지만 여러 번 오는 손님은 대충 기억했다. 그래서 주문을 하기 전에 “햄토스트요?”라고 말하거나 채소의 양을 알아서 조절해 줬다. 자신을 알아주자 손님들은 더 좋아했다. 단골이 됐고, 새로운 손님을 데려왔다.

또 화장실을 자주 안 가려고 물 먹는 것도 조절했다. 물의 양은 소변의 양과 직결된다. 다섯 시간 동안 손님을 대하다 보면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갈증이 나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랬더니 소변이 자주 마려웠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하지만 갔다 오면 손님들은 가버렸다.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손님이 가고 안 가고를 떠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이었다. 나는 마시는 물의 양을 조절해 5시간 동안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가스가 떨어지면 가스통을 들고 뛰기도 했다. 토스트를 굽다가 가스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올스톱 된다. 다행히 근처에 가스충전소가 있었다. 갈 때는 그런대로 들 만하지만 가스를 충전하면 보통 무게가 아니다. 당시는 20㎏ 가스통을 갖고 다녔다. 나중에는 5㎏ 가스통을 별도로 갖고 다녔다.

새로운 토스트 메뉴도 개발했다. 고객 한 분이 “오늘도 계란밖에 없습니까”라고 했다. 한 주 정도 있다가 또 오셔서 “계란토스트밖에 없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귀에 꽂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마다 오시는 분도 많은데 이분들이 매일 계란토스트만 드시면 얼마나 질릴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계란을 기본으로, 야채토스트, 치즈토스트, 햄토스트, 이것저것 다 넣은 모듬토스트 이렇게 3가지 메뉴를 개발했다.

소스도 연구하고 개발했다. 처음에는 케첩만 사용했다. 설탕을 안 쓰려고 넣기 시작한 것이 케첩이었다. 외국에는 무슨 소스를 사용할까 알아봤더니 머스터드였다. 나는 케첩과 머스터드 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속된 말로 맛이 죽였다. 그때 오뚜기에서 ‘허니 머스터드’를 출시했다. 이 제품이 비쌌지만 나는 과감히 사용했다.

그런 날도 있었다. 다음날 장사할 준비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데 잠이 안 왔다. 손님들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토스트에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 

장사를 마무리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다. 어떤 분은 사인을 받고 싶어 했고, 어떤 분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어떤 이는 토스트 만드는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이 노하우를 모두 공개했다. ‘우리는 모두 맛있는 토스트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제법 거창한 이유를 만들었다. 또 언젠가는 사람들도 다 알 텐데 굳이 안 가르쳐준다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노하우를 알려 달라는 이들을 근처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정리를 마치고 그곳에 가면 보통 하루에 60∼70명이 기다렸다. 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고 가운데에 내 자리를 비워 놨다. 사람들은 체인점을 내게 해 달라고도 했다. 

2000년 체인점 10개를 내줬다. 그냥 이름만 쓰라고 했다. 체인점이 뭔지 잘 모를 때였다. 그러다 보니 토스트의 질, 위생관리 등이 안 됐다. 시행착오를 거쳐 2004년 8월 정식으로 프랜차이즈를 내주기 시작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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