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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원출처 :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3. 기독교의 하나님:삼위일체] 


이전에 삼위일체가 어떤 개념일까 고민하면서 

"내 아버지가 사촌에게는 작은 아버지요, 할아버지에게는 아들, 엄마에게는 남편'이라는 식인가 싶었네요.

그러면 한사람이면서 다른 세사람으로 불리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하네요.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은 각각 다른분이면서 또 한분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네요.

이를 정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보면 이단으로 흐른다고.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인격적으로 각각 존재하며 

이들이 동등한 지위로 하나의 신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어느 특정 구절이 아니라 성경전체서 나온 개념이다.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성경적 근거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 1:1). 

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요 1:3). 


.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스스로 비워 인간이 되셨다(빌 2:6 이하). 

또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했다’라고 단적으로 선언한다(고후 5:19). 


예수님이 직접 말씀도 하셨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자.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이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요 14:11) 계신다고 하셨다.



둘째 성령님도 동일한 위격이라는 근거다.

성령님은 성부의 영(마 10:20)이고, 아들의 영(갈 4:6)이며, 예수의 영(행 16:7)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님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롬 8:9∼11). 

이와 함께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삼위인 것을 명시하는 구절들이다.

 두 위격을 함께 언급하는 성경구절(롬 8:11, 고후 4:4, 엡 1:20, 딤전 1:2, 벧전 1:21 등)과 

세 위격이 한 쌍을 이루는 성경구절(마 28:19, 행 2:32∼33, 갈 3:11∼14, 벧전 1:2, 고후 13:13, 요 3:34∼35, 딛 3:4∼6 등)은 삼위 위격을 전제로 한다.


 김동건 교수는 "그러나 위에 언급된 성경구절에 너무 의존할 필요는 없다"며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의 모든 행적이 성령님과 함께, 또 하나님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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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완전히 끝인가.


사람은 죽은후에 어떻게 되나.

기독교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돼 계속 살수 있다고 설명한다. 



증거는 죽어본 사람들의 임사경험(Near-Death Experience)이다.

심장마비나 뇌사로 죽은후 5분, 6분, 

또는 10분이나 30분, 심지어 3시간후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


미국 갤럽은 미국에서만 약2300만명이 그런 경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기록은 30년전 것으로 지금은 더 많은 사람이 임사경험을 했을 것이다.


임사경험자들은 말한다.

첫째 3분의 1이 죽은후 뭔가를 봤다고 한다. 

그 뭔가는 죽은이후 주변의 상황, 즉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있었는지, 어떻게 병원에 갔는지, 

병원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등이다.


20분동안 심장 박동이 멈춰던 11살 소년은 병실 천장에서 아래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볼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눈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다.

철학자 게리 하버마스가 쓴 ‘죽음 넘어’에 나오는 소년이다.


이는 죽어도 영혼은 계속 살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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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원관, 타종교와 어떻게 다른가.

원출처:[박명룡 목사의 시편] 종교 다원주의와 구원관


구원의 차이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타 종교는 대체로 인간이 자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편적인 관점을 경험하게 되는 것, 또는 자기를 비우고 궁극적 실재와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구원받는 방법의 차이

기독교는 타종교와 구원받는 방법에서 현격히 차이가 난다. 

기독교에선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하지만 불교에선 인간이 성불, 즉 노력해서 열반에 이른다. 

열반은 현실 세계의 '나'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무아적 구원, 비인격적인 구원이다.


이슬람교에선 율법을 준수해 천국에 간다. 역시 자력구원이다.


힌두교에선 모든 자아의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노력 필요) 초연해져 브라만(절대자)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브라만은 비인격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근본 원리며 궁극적 실재다.

따라서 우주와 하나님이 하나이며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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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몰랐던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은 지옥 갔을까.

10월 26일 열리는 ‘제2회 기독교변증 콘퍼런스’때문에 생각해본 것입니다.

예수를 몰랐던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은 지옥 갔을까?

안티기독교인들의 단골 질문이랍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한번 이상은 고민했던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답이라 말하진 못해도, 변증전도연구소가 만든 

'기독교에 대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7가지'에 설명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Q5/ 예수 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가나?


A/ 하나님은 알게 해주신 지식만큼 심판하십니다. 

옛날 사람들의 구원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성경은 복음이 전해진 이후에는 누구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책임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장 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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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Funny Love'는 한글 '퍼니 러브'로

*단문으로

*작년은 지난해로 

*영어 'Funny Love'는 한글 '퍼니 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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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돌발행동 분석 보고서

내 아이의 돌발행동 분석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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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진리의 기준] ④성경은 무오한가

원출처: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④성경은 무오한가


성경의 문자적 무오여부 따지기 보다 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진정성 찾아야


오늘은 성경과 연관해 논란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려 한다. 성경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성서비평학’에 대해 볼 것이고, 이어서 ‘새로운 성경’이 나오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은 무오한 것인지를 보겠다. 


성서비평학 


성경과 연관해서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성서비평학’이다. 19세기 이전의 성서비평은 성경의 원전과 가장 가까운 본문을 찾는 ‘본문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되면서 성경이 역사적 과정을 거쳐 발전되고 편집됐다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신약의 네 복음서가 연구의 중심에 놓였다. 연구를 거듭하면서 다수의 학자들은 네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먼저 쓰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마가복음은 마가가 예수님에 대해 직접 본 것을 단숨에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 어록’(Q자료)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가복음과 어록을 중심으로 두 자료설, 혹은 마태와 누가가 참고했다고 가정하는 각각의 자료를 더해서 네 자료설이 나왔다. 그리고 자료설을 바탕으로 여러 비평 방법이 발전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음서가 일정한 형식(form)으로 구분돼 있다는 양식비평, 저자의 신학이 자료 선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편집비평, 복음서를 이야기의 전개로 보는 서술비평 등이 있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성서비평학과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한다. 그럼 성서비평학에 대해 간략한 정리해 보자. 우리는 성서비평학이 나오기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성경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됐기에 성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나 연구는 필요하다. 성서비평학은 성경 문헌의 발전 과정과 배경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성서비평학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성서비평학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고 수정됐다. 지금도 다양한 비평 방법이 실험적으로 제시되고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비평학도 절대적 가치는 없다. 성경의 말씀을 보다 잘 드러내는 것에 봉사하는 범위에서 성서비평학을 사용하면 되겠다.


새로운 성경의 출현?


최근 우리나라에는 성경과 관련해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도마복음’이 일반인에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생겼다. 더 근래에는 가롯 유다를 호의적으로 묘사한 ‘유다복음’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사회적으로 시끄러웠다. 사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돼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연구가 끝났다. 유다복음도 2세기에 처음 알려진 후 오래전에 기독교 전승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지 못한 배제된 자료다. 


그런데 일부 언론과 얼마의 대중적 인사들이 도마복음과 유다복음을 언급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선일보는 유다복음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식으로 긴 지면을 할애해 소개했다. 또 김용옥은 도마복음을 신약성경이 알려주지 못한 예수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대단한 자료인 것처럼 주장했다. 중앙일보가 김용옥의 주장에 대해 전문적인 검증도 없이 ‘도올의 도마복음’을 2년간 100회에 걸쳐 연재한 것은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 후 일반 신자들이 새로운 성경이 발견될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새로운 성경이 발굴되거나 성경과 동일한 가치의 자료가 발견된다면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이는 기존 성경의 ‘필사본’이 발견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새로운 성경’이 나타나 기존 성경을 대체하거나 혹은 기존 성경과 유사한 권위를 인정받는다면 기독교는 경전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할 것이다. 


과연 미래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필자가 단언하건대 새로운 성경은 없다. 정경의 형성 과정을 보면 새로운 성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경에 들어올 정도의 ‘문서’가 있었다면 이미 초기 공동체들에서 사용됐거나 혹은 최소한 그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교부들의 문헌과 초기 공동체의 자료에는 신약 27권에 필적할 다른 문서가 없었다. 따라서 갑자기 새로운 성경이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 성경은 오늘날 한 개인이나 어떤 집단이 새롭게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성경의 출현 가능성을 말하거나 기존 성경을 능가하는 자료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은 정경 형성 과정에 대해 대단히 무지한 사람이다. 


성경은 무오한가 


성경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 한국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위에 크게 두 가지 관점을 유지했다. 그것은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과 유기적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다.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구절과 문자 하나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에 의했다고 본다. 축자영감설은 성경무오를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축자영감설은 성경 원전이 없다는 점, 성경 번역 시에 생기는 문제점, 성경의 문자나 구절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작업에서 경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기록된 문자와 하나님 말씀을 동일시할 때 뜻이 문자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적영감설은 성경 기자의 인격성이나 언어적 특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성경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다고 보는 관점이다. 최근 성경 필사에 나타난 문제나 번역상 문제를 들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무오를 문자적인 무오류로 볼 필요는 없다. 성경의 무오 여부가 성경을 기록한 언어나 자구의 한계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무오는 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진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유기적영감설은 성경 기자가 가지는 개인적인 특성과 역사적 정황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유지할 수 있다. 최근의 성경 언어에 대한 연구, 성서비평학의 연구 결과, 성경에 대한 전승 등을 고려할 때 유기적영감설 정도면 무리가 없겠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www.facebook.com/dkki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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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진리의 기준] ③ 성경 인식의 주체

원출처: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③ 성경 인식의 주체


성경은 ‘말씀’이 주체가 돼 인간에게 임하는 것


누가 성경을 인식하는가?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인식의 주체는 누구인가? 설교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인식하는 것은 ‘나’인가? 어려운 질문을 했다. 그러나 ‘성경’과 연관해서 반드시 답변돼야 할 질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하더라도, 성경의 권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성경인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만약 인간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결국 성경은 인간의 판단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인식의 주체, 인간?


현대에 해석학은 신학, 역사, 철학, 문학 등 여러 학문의 분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해석학은 경전, 고대문헌, 철학, 역사적 자료, 시, 기호와 같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기술이다. 해석학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다. 인간이 문헌을 읽고 해석한다. 즉 자료를 읽고 인식하는 주체는 ‘나’이다. 내가 인식하는 ‘주체’(subject)이고, 자료는 나에게 인식의 ‘대상’(object)이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일반 해석학의 방법을 성경해석에 적용했다. 일반 해석학의 방법을 성경에 적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일반 해석학을 적용할 때, 인간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주체가 되고, 성경은 인간에게 인식되는 대상이 된다. 인간이 어떤 해석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성경의 의미는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다. 


오늘날 이런 구조는 설교나 성경읽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현대에는 인간이 설교와 성경읽기의 주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다. 설교에서도 인간이 주체가 되고, 성경말씀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구조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목사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설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한다. 설교에서 목사는 선포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의 대상이 되어 신도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는 자신이 선포의 주체라는 착각에 빠진다. 자신이 선포한 설교에 대한 반응이 좋으면, 우쭐해 하는 목회자도 있다. 목회자 중에 스스로 ‘큰 종’이나 ‘불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교만한 자도 있다. 목회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이 놀라운 역사를 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자신이 말씀 선포의 주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을 평가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말씀을 대상으로서 인식한다. 말씀을 들으며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설교를 듣고, 설교가 감동이 되면 목회자에게 감사를 전한다. 성경을 읽는 것도 동일한 구조이다. 인간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읽는다. 인간은 성경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성경의 말씀은 판단을 받는 대상이 된다. 역시 두려운 일이다.


선포의 주체가 인간이 되고, 인식의 주체가 인간이 될 때, 성경과 선포된 말씀은 권위를 상실한다. 인간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이 주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인식의 주체, 하나님?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해석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떤 해석방법을 따를 것인지에 있다. 20세기가 되면서 성경을 일반 텍스트와 동일한 기준으로 해석해도 되는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되는 해석학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신학자 바르트(K. Barth)의 공헌이 컸다.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연구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또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계시한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말씀한 것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이 주체로서 말씀하시면 인간은 단지 들어야 한다.


인간이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죄 된 인간은 ‘위기’를 느끼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을 알게 될 뿐이다. 인간이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인간을 말씀 앞에 세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인간이 말씀을 선포하고, 인간이 말씀을 듣고, 인간이 성경을 읽는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로 있는 동안 성경은 아직 인간의 언어일 뿐이고, 그 설교는 인간의 말일 뿐이다. 인간의 말로 있는 동안, 그 말씀은 구원의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통해 선포되지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인간에게 임한다. 하나님이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살아 움직여 나에게 임한다. 말씀이 주체인 것이다. 인간이 ‘예수님을’(object)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선포 속에서 ‘예수님이’(subject) 나에게 임한다. 이때 말씀은 구원의 사건이 된다. ‘인간이’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모양을 가진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주체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선포하는 목회자든 듣는 신자든,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지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만약 목회자의 선포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면, 만약 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며 놀라운 체험을 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말씀이 주체로서 일으키는 사건이다.


계시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말씀의 능력이다. 성경이 읽혀지고 구원사건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말씀 스스로가 가지는 능력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인식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은혜의 사건이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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