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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진리의 기준] ② 성경 형성의 주체

원출처: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② 성경 형성의 주체


성경의 ‘경전’화 주체, 교회냐 성령이냐


21세기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형성됐다는 입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만약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면, 성경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에서 시작해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당연히 교인들은 당황했고, 신앙의 혼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교리적 선언만 반복했다. 교회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했고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의문은 가중됐다. 오늘은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을 통해, 성경형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려 한다.


역사적 산물


교회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성경’을 결정했다는 주장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이 견해는 교회가 일정한 기준을 따라 성경을 수집했고, 교회 회의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전형성 과정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간략한 요지를 보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다. 초기 공동체는 구약과 다양한 신앙의 ‘자료들’을 예배와 신앙생활을 위해 사용했다. 신앙의 자료들은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것, 서신, 신앙고백과 같은 것으로서, 일정한 형식은 없었다. 당시는 네 복음서가 확정되지 않았고, 복음서들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다. 나중에 정경으로 분류되지 못한 자료들은 외경, 위경, 혹은 유사 복음서 등으로 분류됐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료들을 수집할 필요를 느꼈다. 교회가 자료들을 수집한 ‘기준’은 대략 네 가지다. (1)사도가 직접 저술했는지 여부 (2)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사도적 전승에 속하는지 여부 (3)당시 교회 공동체에서 높게 평가 받았는지 여부 (4)교회 공동체가 인정한 기존의 자료와 유사한 가치를 가지는지 여부 등이다. 


교회는 이런 기준으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하다가, 일정한 기간 후에 경전으로 인정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397년 제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27권을 채택했다. 그 후 몇 차례 더 교회 회의를 통해 27권을 확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약의 경전화가 완료됐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성경의 경전으로서의 절대성은 상실될 가능성이 크다. 교회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 견해는 결국 성경을 수집하고 결정한 ‘주체’를 교회 혹은 인간으로 보게 된다.


성령의 인도


‘성령’이 성경기록의 주체라는 입장을 보자. 이 입장은 과거에 교회가 유지했다가 시들해진 견해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이 입장에 다시 접근할 필요가 제기된다. 최근의 역사비평학, 고고학, 문헌연구는 과거 문서들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준다.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 4세기 경 교회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것에 대해 반론이 일어났고, 정경 형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그 이유를 보겠다.


(1)초기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순교로써 기독교를 수호하고 이단과 싸웠다. 그들은 복음서들과 서신들을 신앙의 규범으로 사용했다. 초기 이단들과 논쟁에서 사용한 글들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이 어떤 복음서들과 서신들을 ‘성경’으로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2)기독교 가장 초기의 중요 교부들의 저술을 보면 어떤 ‘성경’을 사용했는지가 나온다. 사도적 저술로 분류된 것은 5개였지만, 지금은 3개를 추가해 8개를 주요 초기자료로 본다. 이 저술들과 비슷한 시기인 1∼3세기에 활동한 교부들에게서 그들이 사용한 ‘성경’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나 권수가 나온다.


(3)최근에 1∼3세기 경 광범위한 지역의 신앙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복음서나 서신을 ‘성경’으로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됐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정보의 교환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 대부분의 지역은 ‘성경’을 독립적으로 결정해 사용했다. 유통되던 복음서만 해도 30개가량 있었다. 각 공동체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교부들의 글, 초기 중요 8개 저술, 다양한 지역의 초기 공동체들에서, 4세기 이전에 사용한 ‘성경’이 놀랄 만큼 유사하다. 


즉 교회가 정경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일치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연구하는 스탠튼(G. Stanton)과 로제(B. Lohse)는 4세기에 교회대표들이 모여 회의에서 경전을 결정했다는 주장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즉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던 성경을 교회는 단지 받아들이고 추인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틴지역과 헬라지역의 교부들과 넓게 흩어진 여러 공동체 사이에 신약의 종류와 범위가 어떻게 이런 높은 일치도를 보일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합리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확률로 설명하기에는 가능성이 너무 낮다.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경전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경전화에 대한 주체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의미이다. 


학문적 차원에서 보면, 위의 두 가지 입장은 모두 더 보완해야 한다. 두 입장 모두 학설로서 가치가 있고,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도 있다. 현재 신학계 내부에서는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전자의 입장이 팽배하다. 하지만 이 주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견해는 여전히 하나의 가설이다. 아직 교회가 경전을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수집했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앞으로 좀 더 진전된 연구와 발굴이 진행되면, 교회가 성경을 수집하고 결정했다는 근거를 발견할지, 혹은 정경 형성과정이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성령님을 향하게 될지가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성경의 내용과 경전 형성의 주체는 성령님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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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진리의 기준] ① 성경의 권위

원출처 :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① 성경의 권위



성경이 ‘권위’를 잃으면 모든걸 잃는다


근대 이후 ‘성경의 권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모든 ‘권위’는 이성의 심판 앞에 서야 했다. 이성에 대한 강조, 역사의식의 대두, 비판적 사고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사회제도와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21세기, 주어진 ‘권위’를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8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성경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받았다. 지금은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현대인은 자율적 비판의 시대에 산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도 타율적이고 맹목적인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원하고, 권위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기독교인은 그렇게 믿는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을 때 답답하지만 침묵하게 된다.


경전종교 


먼저 질문을 해보자. 성경의 권위가 중요한가? 그렇다.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는 성경의 권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가 ‘경전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연종교와 구조적으로 다르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을 통해 ‘신’에게 도달한다. 이성을 통해 도달하려는 시도는 이신론으로 나타났고, 자연을 통해 도달하려는 시도는 범신론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은 철학의 형태에서 자주 보이고, 범신론은 원시종교에서부터 현대의 다양한 종교적 형태에서 발견된다. 기독교는 자기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와도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다. 불교는 인격적인 신 개념이 약하고, 모든 사람이 각성을 통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계시’에 대한 기록인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계시는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다. 즉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진리를 얻기 위해 해탈을 하거나, 각성해서 깨닫거나, 대자연의 이치를 통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이 계시를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어떤 종교든, 학문이든 각기 진리의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의존한다. 다른 어떤 기준이나 근거로 성경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구조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계시종교, 혹은 경전종교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대한 권위는 결정적이다.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는 순간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님의 메시아 됨, 성령님의 임재하심, 그리고 부활신앙도 모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만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성경 권위의 근거 


성경의 권위는 기독교 초기부터 도전을 받았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매 시대는 그 시대의 도전 앞에서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교회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존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권이나 일부 성직자가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가 비롯되는 근거는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그의 선하신 섭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 성령의 은총, 새로운 공동체, 그리고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의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종교적 권위가 아니다. 교회 조직이나 교권에 의해 유지되는 강제적 권위와 다르다. 어떤 조직이나 사람이 성경을 진리하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스스로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성경되게 하라’고 했고, 칼뱅은 성경의 진리는 최종적으로 ‘성령의 증거’에 의한다고 한 것이다. 교회가 진리를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성경 안에 있고, 그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이고 기독교다. 


성경의 권위와 합리성 


마지막으로 성경의 권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자. 그리스도인은 자주 성경의 진리가 이성과 충돌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지성을 포기하면서 성경을 믿어야 하는지 갈등한다. 물론 성경의 진리가 언제나 합리성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이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기도 하고, 합리성과 다른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상당한 부분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믿음으로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이 두 부분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많은 학설과 주장이 있다. 이 도전들에 대해 교회는 무조건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교회의 이런 태도는 권위주의적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킨다.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우리 시대’가 자신과의 대화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성’이다. 즉 우리 시대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이 필요하다. 본 강좌에서 앞으로 세 번 더 성경과 연관된 사안을 다루겠다. 성경은 누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성경 인식의 주체는 누구인지, 그리고 성경은 무오한지 등을 보겠다. 이를 통해 여러분은 성경의 권위가 합리성을 넘어서는 독특한 면도 있고, 또 합리성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주제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성경관의 토대를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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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는 하나만

*동사는 하나만 "알려 이런 분위기를 역전시켜야 한다"보다 "알려야 한다"로

*단어는 더 명확하게 "이것이"보다 "주장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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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름방학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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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제공과 무상 제공의 차이

*'무료로 제공한다'는 '무상으로 제공한다'로

 - 무상은 모든 상황에서(무조건) 공짜, 무료는 조건별 공짜 인듯

 - 최근 이슈가 됐던 '무상급식'과 관련해 인터넷에서 이런 설명이 있음. 

    . 무료급식 ..가난한자에게는 무료로 밥을주고 부자에게는 돈을받고 밥을주는것(현재실행)

    . 무상급식...모든 학생들에게 무료로 밥을주는것  단, 부자들에게는 세금으로 그 비용을 대체하는것


*생뚱맞은 고유명사에는 작은 따옴표를


*'처음으로'는 '최초로' 차이는 추후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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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전 사고

원출처/ 위키백과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내용입니다.  클릭



일본 원전사고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말한다. 

이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앞바다 지진으로,

또 다음날인 3월 12일 쓰나미로 인해

냉각 시스템이 고장나 발생한 사고다.




이 사고로 방사능이 공기중으로 누출됐고 

태평양으로도 유출됐다.


1986년 소련(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원자력 사고 최고 등급인 7등급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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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문:신학과 신앙] ⑤ 신학과 교회

원문: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⑤ 신학과 교회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신학이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돈독해야 할 ‘신학과 교회’의 관계가 이렇게 소원해졌으니 걱정스러운 일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신학과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일반 신도들이 가지는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목회자들이 가지는 오해이다. 그 오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두 가지 오해


독자들은 ‘목회자가 너무 신학적이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평신도 사이에서 자주하는 이야기이다. 이와 유사한 말로는 ‘목회자가 신학공부를 많이 하면 설교가 잠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신학공부 좀 했다고 설교시간에 현학적인 말로 일관하는 목회자에 대한 경종의 이야기다. 


‘목회자의 신학공부’에 대해 비판하는 신도들의 마음을 짐작하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신학이 교회 발전을 가로막거나, 설교를 졸리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 현상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은 그 목회자의 문제일 뿐이다. 오히려 신학을 경시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여러분은 신학 없이 소리만 지르는 설교가 좋나요? 혹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내용 없는 설교에 지치지 않았나요? 그러니 목회자에게 신학공부는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을 신학 탓으로 돌린다면 ‘신학’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신학’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른 오해는 ‘평신도가 신학공부를 하면 교회가 피곤해진다’는 생각이다. 이 말은 주로 목회자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은 평신도 중에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이 목회자의 말에 부정적으로 토를 달거나, 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는 평신도가 신학공부를 하거나 신학서적을 읽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 자체가 이런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가 ‘신학’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마 신학공부를 잘못한 그 평신도의 인격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는 평신도가 신학 공부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그 평신도는 목회자의 든든한 동역자가 될 것이고, 교회를 위한 훌륭한 영적 후원자가 될 것이다. 평신도가 변하지 않고는 한국교회가 변할 수 없지 않은가. 목회자건, 평신도건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일이다.


존중과 긴장


이제 ‘신학과 교회’에 대한 오해를 풀었으니 바람직한 관계를 보자. 신학과 교회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존중과 긴장’이라는 두 측면이 함께 고려될 때 신학과 교회는 건전한 관계가 된다. 그러면 두 가지 측면을 보자. 


첫째, 신학은 ‘교회의 신학’이고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교회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교회와 분리되면 추상적이 되고 사변화된다. 신학은 교회에서 선포되고 행해지는 신앙을 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설교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교회가 당면한 시대적 어려움에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 


신학은 개인의 지적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자신의 신학공부가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인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신학은 단순히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작업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신학이 교회와 분리될 때 신학은 교회로부터 외면당한다.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해서 가지게 되는 잘못된 비판의식이나 우월의식은 공동체를 망친다. 신학은 교회를 존중해야 한다. 신학은 언제나 교회의 학문이다.


둘째, 신학은 ‘현실 교회’에 종속되지 않는다. 현실의 교회는 아직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신학은 현실교회가 역사와 사회라는 더 큰 범주 안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이때 신학은 교회와 긴장을 가진다. 


현실의 교회는 언제나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대부분 교회는 자신의 교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교회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충고는 듣기 싫어한다. 만약 어떤 신학자가 교회 성장에 열심인 목회자나 신자에게 ‘교회 성장’의 의미를 질문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 교회가 열심히 진행하는 ‘성장’이 무엇을 추구하는 성장인가?’ 그 목회자와 신자는 이런 질문 자체를 싫어할 것이다. 혹은 어떤 신학자가 교회의 방향성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치자. ‘당신이 속한 교회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 상당수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당황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은 ‘자신의 교회’에 갇혀 있기 때문에 좀 더 넓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교회를 평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상실할 때 언제나 역사적 과오에 빠졌다. 히틀러 당시의 독일교회가 그랬고, 군사독재 시절 한국교회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오늘도 한국교회는 사회에서 바른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비판 앞에 서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공룡’과 같은 모양이다. 덩치는 크지만 머리는 작은 공룡이 갈 방향을 몰라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두리번거리는 모양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이제 그 ‘덩치’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신학은 교회에 대해 역사책임적 과제를 상기시킨다. 또한 역사 안에서 바른 방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교회가 자신 안에 매몰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교회와 ‘긴장’을 유지한다. 


오늘 강좌에서 신학과 교회가 가지는 두 측면을 보았다. 신학은 ‘교회의 학문’으로 언제나 교회를 존중한다. 동시에 신학은 교회의 방향에 대해 더 큰 시각으로 성찰하도록 한다. 신학과 교회는 존중과 긴장 속에서 건강한 관계를 갖는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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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문:신학과 신앙] ④ 신학과 신앙

원문: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④ 신학과 신앙


“신앙 없는 신학은 무미건조해지고 신학 없는 신앙은 자기주관에 빠진다”


‘신학과 신앙’에 대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는 신학무용론이다. 신학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또 신학을 하면 오히려 신앙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이런 생각은 신학을 단지 학문의 영역으로만 생각했거나, 신학의 비판적 기능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 강좌에서 저번 주에는 ‘신학의 역할’에 대해 말했고, 오늘은 신학과 신앙의 관계에 집중하려 한다.


신학과 신앙, 이원론?


한국교회는 신학과 신앙을 상충하는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근저에는 한국종교 문화에 뿌리 깊게 놓인 이원론적 사고가 자리한다. 이원론은 빛과 어두움, 성과 속, 영과 육, 이 세상과 저 세상, 교회와 세상 등을 대립적으로 보는 사고이다. 이원론적 사고는 어느 한 측면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다른 한 측면이 가지는 가치를 경시한다.


성경의 사상은 이원론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저 세상’에 대한 소망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도 중요하다. 성경은 ‘영’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의 세계’도 중요시한다. 따라서 ‘영과 육’을 대립해서 보지 않고 조화롭게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에서 영과 육의 균형이 깨지면 신앙이 극단적이 되거나 기형적이 된다.


신학과 신앙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도 이원론적인 사고와 연관이 있다. 즉 신학은 이성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추구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신앙은 감성적이며 체험적인 것으로 본다. 신앙을 강조할 때, ‘가슴으로 믿으라’고 말하는 이유다. 영과 육의 대립에서 한국교회는 언제나 ‘영’에 힘을 실었다. 마찬가지로 신학과 신앙의 대립에서는 ‘신앙’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은 신앙과 신학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양자는 자신의 역할을 가지면서 상호 보완적이다. 결국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면 신앙과 신학이 가지는 각자의 역할과 상호성을 보겠다.


신학과 신앙, 고유성


신학과 신앙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신학과 신앙은 각기 나름의 효용성과 타당성을 가진다. 신앙이 은혜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라면, 신학은 신앙과 실천에 대한 2차적인 성찰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은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선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기에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이 믿음은 우리의 인식론적 이해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는가? 부활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부활신앙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기적의 성격을 가진다.


믿음은 ‘나’를 넘어선다. 신앙에는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이 요청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을 ‘초월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체험이 점진적일 수도 있고, 뜨거울 수도 있다.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신앙에는 체험이 수반된다. 이 체험은 바로 ‘하나님-체험’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거룩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다.


신학은 학문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이해를 추구한다. 안셀름(Anselm)의 정의를 따르면,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인간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추구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알고 계실까?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린 것일까? 이런 질문은 결코 불경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마땅히 던질 수 있고, 또 던져야만 하는 질문이다.


질문은 합리성을 요구한다. 이성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 이해를 구한다. 이는 삶 속에서 이해되지 않은 사건을 마주하면 설명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신학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합당한 이해를 마련하는 작업을 한다.


또한 신학은 비판적 기능을 가진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주어진 답변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학은 언제나 타당성을 검증한다. 때로는 당연하게 여기던 신앙의 형태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성찰을 요구한다. 때로는 교회의 선포가 문제가 없는지 의문을 가진다. 때로는 교회가 사회에서 바른 역할을 하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이런 비판의 눈길이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적 기능도 신학의 한 역할이다.


신학과 신앙, 보완적


이제 질문을 해보자. 신앙과 신학,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만약 이 질문이 양자택일을 요구한다면 잘못된 질문이다. 어느 것을 우선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신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신앙이 없으면 신학은 열정을 상실한다. 신앙이 없는 신학 탐구는 신학을 종교학으로 만든다. 신학은 모든 종교를 중립적으로 대하면서 단지 지적 만족을 위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언제나 신앙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신앙 없는 신학은 학문적 이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이때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타당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반면 신학이 없는 신앙은 언제나 자신의 체험에 종속될 위험을 가진다. 성경의 세계는 넓고 하나님의 뜻은 무한하다. 신학을 통한 객관적 성찰의 기회가 없으면 각 신자는 자신의 신앙 체험의 한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신학을 통해 신앙은 개인의 주관성에 빠지지 않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신학과 신앙은 서로를 돕는다. 신학이 신앙 안에 있을 때 열정을 가진다. 신앙이 신학적 토대를 가지면 흔들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렇게 정의한다. ‘신앙이 없는 신학은 건조해지고, 신학이 없는 신앙은 자기 주관성에 빠진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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