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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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7)
[역경의 열매] 김우정 (6) 병원 모습 갖춰지자 훈련된 의료진 필요해

수술방 3개를 만들기 위해 쌓던 벽돌을 헐고 방 하나를 크게 늘렸다. 심장수술도 할 수 있는 큰 수술방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심장수술실에는 의료진 열두세 명이 들어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환자 앞에 의사가 4명, 간호사 3명이 있어야 하고 마취 의사, 마취 간호사가 필요하다. 수술하는 동안 심장과 폐 역할을 하는 인공 심폐기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전담 인력 2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최소 11명이 필요하다. 5년 후 실제 그곳에서 심장수술이 진행됐다.

캄보디아에 병원을 세우다 보니 우리는 통관 전문가가 됐다. 의료장비를 사 오고 얻어오고 하며 통관을 많이 했다. 물류회사만큼은 아니어도 1년이면 컨테이너 4~5개는 받았다.

병원 건물도 세워지고 의료장비도 어느 정도 마련됐다. 이제는 훈련된 의료진이 필요했다. 처음 헤브론병원을 시작할 때 같이한 4명의 의료선교사는 소아과 의사 2명,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1명, 치과 의사 1명이었다. 우리 팀만으로는 큰 병원을 운영하기가 어려웠다. 나머지 부분을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온 의료진이 채워줬다.

성형외과 의사들로 팀을 이룬 성형외과팀이 오고, 갑상선 유방암 특화팀인 장기려박사기념사업팀이 1년에 한 번씩 와서 수술했다. 여러 다양한 팀들이 연결되면서 1년에 35개 가량의 의료봉사팀이 들어왔다. 봉사자들도 연결돼 병원을 찾았다.

처음에는 외래환자만 봤다. 이후 내과, 외과 의사가 보강되면서 수술도 하고 입원환자도 받았다. 초기에는 맹장 수술만 해도 긴장하며 땀을 흘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수술도 할 수 있을 만큼 역량이 커졌다. 병원 식구도 크게 늘어 건물을 지었을 때 30여명에서 지금은 140여명이 됐다.

지난해 병원을 증축하면서 인공신장 및 혈액 투석실도 오픈했다. 캄보디아에는 예상 외로 당뇨병과 요로 결석이 많아 혈액투석이 진작부터 필요했다. 호스피스 병동도 열었다. 혈액투석실은 홍콩 기독의사회팀과 협력해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은 한국의 샘물호스피스 병원의 후원으로 시작하게 됐다. 병원건물은 처음 3305㎡(1000평)에서 6611㎡(2000평)로 확장됐다. 동역자와 스태프들도 많아졌고 후원자, 후원교회도 늘었다.

심장센터와 간호대학도 세웠다. 심장센터는 비용이 엄청 많이 든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유난히 많은 선천성 심장병 아이들을 위해서는 심장센터가 필요했다. 심장센터를 만드는데는 대략 10억원이 들었는데 소아심장학의 권위자인 최정연 분당서울대병원 교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헤브론 병원에서 40여명의 선천성 심장병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가 수술시켜줬다. 이분이 아이들을 한국에 지속적으로 데려오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들고 어려우니 헤브론병원에 심장센터를 만들어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치료를 하자고 제안했다.

심장센터는 의료장비만 갖추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심장수술에 특화된 전문 의료 인력이 확보돼야 하는데 우리에겐 없었다. 수술은 외부의 봉사하는 수술팀이 하더라도 수술 후 중요한 중환자실 치료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중환자실 전문 간호사가 있었다. 최기주 간호사로 심장수술이 있을 때마다 수 년째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덕분에 심장수술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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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우정 (5) 건축비도 부족한 상황에 미리 증축할 생각까지…

처음에 설계된 병원은 연건평 3305㎡(1000평) 규모의 3층 건물이었다. 연못을 흙으로 메꾼 지반이 약한 곳이라 파일(Pile·말뚝)을 많아 박아야 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30㎝x30㎝, 9m 길이의 파일은 구하기 어려워 병원 마당에서 직접 제작해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초공사하면서 혹시라도 나중에 공간이 모자라 증축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증축할 수 있도록 기초와 기둥을 튼튼히 하기로 했다. 여기에 돈을 많이 들였다. 또 3층 천정까지 철근 구조 공사를 한 후 3층 옥상의 철근을 자르지 않고 시멘트로 덮어뒀다. 이 역시 증축을 하려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11월 25일 기공 예배, 2010년 9월 10일 준공 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9년 만인 지난해 3층에서 5층으로 증축하고 11월 캄보디아 정부 관계자들을 초청해 준공식을 하고 후원단체인 ‘위드헤브론’ 분들과 함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4층은 병실로, 5층은 호스피스 병동과 직원 식당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병원은 건물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의료장비, 의료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환자가 있어야 하는데 환자는 넘쳤다. 문제는 의료 장비와 훈련된 의료인력 확보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의료장비는 워낙 비싸니까 새 장비를 살 생각을 못했다.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2008년 미국의 GCM(Global Cross Movement)이라는 선교단체를 알게 됐다. 미국 덴버에 있는 선교 단체로 미국의 큰 병원이 새로운 장비를 교체할 때 나오는 구형 장비를 받아서 보관했다가 제3 세계 필요한 곳에 보내주는 일을 했다.

우리는 거기에서 컨테이너로 4개쯤 받았다. 특히 수술방에서 쓰는 수술대, 수술등, 마취 기계 등을 3세트 얻었다. 처음에는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설치할 수 있는 수술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GCM 대표가 마취과 의사인데 자기 경험상 수술방이 3개는 돼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건물을 짓기 시작한 때라 헤브론에 도착한 수술방 3세트를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이를 설치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수술등이 엄청 크고 무거운데 이런 것을 천장에 달아본 사람이 없었다. 또 미국에서 온 것은 사용 전압이 110V였다. 캄보디아와는 전압이 달랐다. 전압 차이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하고 주의를 시켰지만 실수가 계속 발생했다. 이로 인한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미국에서 건너온 마취기계는 최근까지 잘 사용할 수 있었고 여러 환자를 살려내는 데 공헌했다.

마련된 수술 세트가 3세트니까 수술방도 3개를 준비했다. 수술방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폐공간이다. 창문이 있지만 열리지 않는다. 오염 먼지 곤충 등을 차단하면서 환기도 시켜야 한다. 그런 완벽한 수술방은 우리 형편으로는 만들기 어렵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그래서 3개의 수술방을 만들려고 벽돌을 쌓는데 어느 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는 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의료인력이 없어 사용이 어렵겠지만 나중에 심장 수술, 뇌수술 같은 큰 수술을 할지 누가 알겠어. 그러려면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야하는데.’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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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우정 (4) “한국서 용한 의료진이 왔다”… 환자들로 북새통

 

처음 헤브론병원은 조그마한 별장같은 집을 리모델링한 클리닉이었다. 의료장비도 별로 없고 한국 의료인 4명, 캄보디아 직원 5명의 아주 작은 규모였다. 개원한 지 한두 달 되니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료인데다 외국 의사들이 진료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잘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가난한 캄보디아 환자들이 의사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을 때였다. 시골 할머니들이 작은 방에 가득 들어와 방 안 온도가 32도까지 올라갔다.

병원 부지는 있었다. 충무교회가 사 준 땅으로 건기에 구입했다. 그게 문제였다. 2월에 계약했는데 그때는 땅이 바짝 말랐을 때였다. 나무도 있고 꽃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 싶었다. 큰 연못도 있었고 낭만적이었다. 그해에는 괜찮았다. 비가 많이 안 왔으니까. 그 다음해 2008년 8월 홍수가 났다. 비가 3일 동안 엄청나게 내리자 연못이 범람했다. 온누리교회팀 50여명이 단기선교를 왔을 때였다. 

프놈펜은 평지다. 사방 50㎞가 그렇다. 그래서 저지대는 물이 찬다. 병원 부지에 큰 연못이 두 개 있었는데 한 웅덩이는 메웠지만 남은 웅덩이는 물로 가득찼다. 메운 웅덩이는 한국에 남겨둔 병원이 임대되면서 그 보증금으로 흙을 사다 채웠다. 

메운 땅도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의료팀이 왔다고 하니까 몰려온 사람들이 그 위에까지 가득 채웠다. 2000여명은 됐던 것 같다. 줄을 세우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 시간 정도 노력하다 절반을 집에 보냈다. 

비는 멈추지 않았고 진료실과 약 상자가 쌓인 방까지 물이 들어가려 했다. 화장실은 이미 범람했다. 일단 방이 침수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온 시내를 뒤져서 마대 자루를 사다가 200여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쌓았다. 2~3일을 겨우 견뎠다. 지대가 조금 높은 대문가에 천막을 치고 진료했다.

병원 건물이 절실해졌다. 그즈음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의 소아과 병원 자리를 임대한 이가 아예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 푼도 깎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거 팔리면 캄보디아에 병원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을 팔고 8월 중순쯤 잔금을 받았다. 그러고 한 달도 안 돼 미국발 금융 위기가 오면서 환율이 폭등했다. 잔금까지 다 받아 고환율로 인한 손해를 극적으로 피한 것이다. 할렐루야.

병원 건축을 시작했다. 어느 대학 교수가 멋진 설계도와 조감도를 그려줬다. 너무 친환경으로 하는 바람에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냈다. 이어 평생 교회를 설계했다는 한 장로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돈이 없어 설계비는 못 드린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설계도를 그려왔다. 그것이 지금의 병원이다.

건축에 대해 경험도, 아는 바도 없었다. 그냥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2008년 10월 기초공사를 시작하고 11월 25일 충무교회팀, 헤브론 캄보디아 의료선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공 예배를 드렸다. 시공은 한국업체에 맡겼다. 캄보디아 업체는 우리가 제때 공사비를 주지 못하면 벌칙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업체는 그렇게까지 요구하진 않았다. 공사비가 부족해 언제든지 공사가 중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공사가 진행되는 22개월간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그것도 2008년 9월부터 시작한 세계적인 금융위기 중에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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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3> 4전5기 기적의 승리… 나 아닌 하나님의 작품

기억이 생생하다. 카라스키야와의 3회전. 카라스키야가 왼손 연타를 칠 때 나는 있는 힘껏 라이트훅을 날렸다. 안 맞았다. 이어 때린 왼손 더블 펀치는 상대의 배와 턱에 적중했다. 그때 내 눈에 카라스키야의 두 무릎이 들어왔다. 반쯤 주저앉았다 일어났다.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시 들어가면서 원투를 쳤다. 오른손이 적중했고 홀딩 상태가 됐다. 그때 걷어 올린 두 번의 짧은 오른손 어퍼컷이 결정타였다. 

카라스키야의 눈동자를 보고 링 구석에서 계속 몰아붙였다. 자꾸 주먹이 빗나가 상대를 약간 누르듯 공격했다. 두 번이나 그랬다. 주심은 내게 주의를 주며 카라스키야를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판에 카라스키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대로 시합이 끝났다. 4전5기.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의 말씀대로 나는 이겼다.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다.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LA에 도착해 교포들과 만났다. 2년 반 전 자모라에게 졌을 때의 슬픔 대신 기쁨을 남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747점보기의 기장이 “기내에 파나마에서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가 있다”고 방송하자 승객들이 환호하며 박수쳤다.

1등석에 앉아 아버지를 회상했다. 할머니도 생각했다. “너희들은 예수님 믿어야 돼, 예수님 믿으면 복 받아.” 자주 그렇게 말씀했다. 그래서 적지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이 됐나 싶었다. 한 번은 남아공에서 한 번은 파나마에서.  

이기긴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남들은 ‘4전5기’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내가 싸웠던 영상을 보지 못했고 무슨 주먹으로 카라스키야를 KO시켰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큰 트로피를 내 옆에 세우고 승무원들과 축하사진을 찍었다. 즐겁긴 했지만 내가 이긴 것 같지 않고 누군가 나를 이기게 해준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룰 미팅 때 왜 룰이 바뀌었을까. 당초 3번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로 인정하던 룰이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다. 체중을 재고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떻게 심판을 만나게 됐을까. 네 번 다운당한 후 실컷 맞고 있을 때 선수 보호 차원으로 경기를 중단시켰다면. 큰형은 종 치기 바로 전에 수건까지 던지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 서소문 TBC 동양 방송국에 걸린 현수막 글귀가 재미있다. ‘불사신 홍수환’. 

1974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열린 카퍼레이드보다 환영 인파가 2배 더 많았다. 시청 축하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때 비로소 시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심판의 카운트는 분명히 느렸다. 나를 봐주듯 했다. 세 번째 다운당해 로프에 기댔을 때 심판이 내게 다가왔다. 보통은 선수에게 오라고 부른다. 네 번째 쓰러졌을 때 심판이 내게 와서 물었다. 

“You OK(괜찮나)?” “Slippery(미끄러졌어요).” 

이 부분이 가물가물 생각났다. 심판은 미끄럽다고 들었을까, 미끄러졌다고 들었을까.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이번 승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로프 쪽에 몰아놓고 때리는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있는 힘을 다해 치는 무지막지한 연타였다.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켰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다.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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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2>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


홍수환 장로가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카라스키야전에서 4전 5기로 상대를 다운시킨 모습.


드디어 시합 날. 링 위에서 진행된 계체량을 통과하고 빨리 방에 올라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기에서 내 시합 심판인 미국인을 만났다.

“Hey, soo! I’m the referee. Good luck today(수환, 내가 심판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Thank you, but I’m ready for this fight(고마워요. 나는 준비가 돼 있습니다).”

“Where did you learn English(영어 어디서 배웠어요)?”

“High school(고등학교에서요).”

이 짧은 만남은 기적을 만들었다. 왜 시합 하루 전 룰 미팅 때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을까. 왜 시합 날 엘리베이터에서 심판을 만났을까. 경기가 끝난 이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합을 앞두고 나는 라커룸에서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가 나타났다. “수환아, 오늘 시합 네가 이겨. 상대는 펀치가 세지만 턱은 약해. 너는 펀치가 좀 약해도 대신 맷집이 좋잖아. 자모라 봐라, KO로 졌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 안 쓴다.”

나는 이마에 땀이 약간 흐르도록 몸을 풀고 코트라에서 빌린 우리나라 고유의 삿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링 위에 올랐다. 카라스키야도 등장했다. 초록색 가운을 입고 올라온 그의 모습은 이미 챔피언이었다. 애국가가 흐르고 결전의 시간이 왔다. 복싱 선수에게 언제가 제일 긴장되는 순간일까. 바로 ‘세컨드 아웃’이다. 선수 둘만 남으라고 할 때다.

“수환아, 5회전만 넘기면 이 싸움은 네 거다.”

조순현 선생님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링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상대 상체 놀림이 부드러웠다. 주먹도 생각했던 대로 빠르고 가벼웠다. 그리고 강했다. 이제껏 상대를 5회전 안에 모두 보내버린 그런 주먹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다. 5회전 안에 끝내자. 그게 편하겠다.’ 그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1라운드는 잘 싸웠다. 운명의 2라운드. 상대의 전광석화 같은 왼손이 나올 때 나는 라이트훅으로 응수했다. 아뿔싸! 상대가 오른손 어퍼컷과 왼손 훅으로 나를 받아쳤다. ‘걸렸구나!’ 링 밖에서 선생님이 외쳤다. “침착해!”

나는 이미 링 바닥에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쓰러졌다. 그 정도 되자 파나마 관중은 게임이 이미 끝난 줄 알고 축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심판이 나를 살렸다. 카운트를 천천히 셌다.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때 종이 울렸다. 2회전 끝.

종소리를 듣고 겨우 코너로 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꺼내 마시게 했다. 미제 군용 암모니아였다. “정신 나게 하는 거다.” 너무 독해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쭉 마셔. 1회전만 더하고 하지 마!”

‘그래, 1회전만 더하고 그만하자.’ 그러고 나서 앞을 보니 상대 코너의 링 줄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신이 좀 든 것이다.

“1회전만 하고 관둬.” 선생님이 또 외쳤다. 선생님은 눈물을 참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릴 기세였다.

“세컨드 아웃.”

선생님은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링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래. 총을 맞더라도 등에 맞지 말고 앞가슴에 맞고 전사하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소가 너를 받는 게 아니야. 네가 겁먹으니까 소한테 받히는 거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겁이 나를 죽이는 거야. 네 주먹 별거 아니야.’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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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밴텀급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2㎏ 더 올려 주니어 페더급에서 힘 좀 써보자.’ 이런 각오로 연습량을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랐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와 싸운다는 건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했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희망을 못 줄지언정 “질 거면서 거기까지 왜 가냐”는 식이었다. 한 선배는 내가 콜롬비아 선수에게 KO로 패했을 때 “일어나서 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안 일어났다”고까지 했다. 복싱이라고는 1회전도 뛰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나.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제재소에서 사온 통나무를 쪼개며 힘을 키웠다. 샌드백이 ‘ㄱ’자로 꺾일 만큼 펀치력도 키워 나갔다. 신도체육관 조순현 관장에게 어깨 힘 빼는 법도 배웠다. 

시합을 앞두고 권투위원회 회장님과 한 제과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지더라도 잘 싸우고 와라. 오렌지 주스 하나 마셔.” 

적지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치르러 가는데 지더라도 잘 싸우고 오라니. 체중 조절하는 선수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하다니….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란 듯이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는 기관총으로 탱크 쏘러 가는 바보다.’ 이를 악물었다.

만나는 상대가 모두 KO승을 자랑했다. 태국 수코타이 18승 16KO승, 자모라 26승 전승 KO승, 카라스키야도 아마추어 전승으로 11승 모두 KO승이었다. 내 승률은 희박했다. 공항에 나온 가족들에게 필승을 다짐하며 비행기를 탔다. ‘이게 마지막 시합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테말라, 파나마로 가는 항로였다. 이기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탱크에 기관총 쏘다 오느냐의 문제였다. 비행기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서 벌어진 동네 복싱시합을 보러 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나와 같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그때까지 47번을 싸우면서 시합마다 경기 전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시합을 마치면 또 산소를 찾았다. 모두 94번이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앞두고도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자마자 “아버지가 그렇게도 예뻐하시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어릴 때 막내 여동생이 집에서 기르던 하얀색 큰 불도그에게 목이 물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고 어린 여동생을 구했다. 이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수환이 순발력이 엄청 빠르네.” 여동생에게 가까이 있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랐다. 

할머니 생각도 났다. 서울 돈암동에서 살 때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항상 책을 읽었다. 표지는 검정색, 옆은 빨간색인 작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하나님 말씀 책”이라고 하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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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1966년 6월 25일 나의 복싱 영웅이 탄생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그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별로 없던 시대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다니던 중앙고 보이스카우트 행사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TV로 봤다. 그다음 날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도 갔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복싱을 좋아하는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를 가져다 놓겠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마추어 시합에 두 번 나갔다. 두 번 다 졌다. 바로 프로무대에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김준호 선수가 내 아마추어 경기를 보고 조언도 해줬다. 

69년 5월 10일 대구 출신 김상일 선수와 겨뤘다. 경험이 많은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첫 프로경기에선 무승부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합은 서울 청량리 신도체육관 소속 최창배 선수와 만났다. 그때 심판 전원일치로 첫 승을 거뒀다. 1승을 한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지지했다. 

당시 한국 밴텀급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나는 이를 놓고 부산 출신 문정호 선수와 결정전을 가졌다. 5회에서 라이트 어퍼컷과 훅의 연타로 KO승을 거뒀다. 데뷔 1년도 안 돼 한국 챔피언이 된 것이다. 

복싱 판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밴텀급 챔피언은 멕시코의 괴물 올리바레스 선수였다. 동양 챔피언은 일본인 가네자와 선수였다. 이 둘이 세계 타이틀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됐다. 

나는 필리핀 알 디아즈와 결정전을 벌였다.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였다. 이 시합에서 나는 판정으로 이겼다. 정말 갑작스레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까지 거머쥐게 됐다. 

패배도 있었다. 1970년 6월 9일 일본 원정 시합에서의 첫 패배는 한이 됐다. 상대는 일본의 파이터 하라다 선수 동생이자 당시 세계 밴텀급 랭킹 4위였던 우시와카마루 하라다 선수였다. 일본 규슈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아깝게 판정으로 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선수를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불러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완벽 승리였다. 그 선수가 병원에 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는 방송 카메라의 관심을 받았다. 

엄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인천 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안에서 카투사 식당을 했다. 엄마는 버터와 치즈를 허리춤에 차고 나와 내게 주셨다. 나는 버터를 좋아했다. 엄마가 주는 버터를 밥에 비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자식사랑은 대단했다. 나뿐만 아니고 4남3녀 모두에게 말이다.

그즈음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동양 챔피언이 됐으면 복싱선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미군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론 취했다. 그동안 연습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연습은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복싱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매니저가 알고 내게 전화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사실 오늘날 홍수환을 만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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