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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9> 부모의 결혼 반대에 가족 몰래 짐 챙겨나온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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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6. 3. 2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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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유경화는 점자도서를 만드는 점역사였다. 1987년 서울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회 점자도서관에 갔다가 아내를 알게 됐다. 아내는 처음 만난 내게 기꺼이 팔을 내줬다. 보통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는 팔을 잡게 한다. 아내의 살결은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아내는 천사표 아가씨였다. 대학시절 때 ‘책을 읽어 달라’ ‘책을 녹음하는 데 도와 달라’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고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내와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시각장애인이고 가난했다. 동생도 시각장애인이었다. 결혼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6개월간 연락을 끊기도 했다. 


나는 시각장애인대학생연합회 모임에 갔을 때 아내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는 맹인이고 가난하고 내 동생도 맹인이에요.” 아내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그해 겨울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했다.  


아내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당연했다. 그래도 아내를 놓칠 수 없었다. 주변에선 그냥 둘이 먼저 결혼하라고 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92년 2월 8일 오후 5시 서울 한빛교회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장인어른에게 들통이 났다. 아내는 가족 몰래 짐을 챙겨 나왔는데 이를 장인어른이 보셨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장인어른이 한빛맹학교에 전화를 해 알게 됐다. 장인어른이 아내를 붙잡아 집에 가뒀지만 아내는 도망쳤고 나를 찾아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교회 대신 주례를 하기로 한 목사님 댁에서 혼인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버렸다. 


우리는 집에 가야 했지만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13일간 전국을 떠돌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처가를 찾았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두 분은 모든 걸 포기하고 나를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세 명의 자녀를 선물로 주셨다. 첫아이는 딸이었다. ‘예수님의 이웃’이라는 의미로 ‘예린’이라고 이름 지었다. 둘째 동성이는 서울대 대학원 입학시험 즈음에 낳았다. 서울대 대학원은 카이스트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동생 용수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나를 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입학시험 3일을 앞두고 병원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제 쉬러 병원에 갑니다”라고 했을까.


셋째는 내가 박사를 수료하고 8년 뒤 낳았다. ‘어진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혜린’이라고 불렀다. 현재 큰아이는 이화여대 4학년, 둘째는 한동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막내 혜린이는 서울 불암중 1학년이다. 다들 기특하고 대견하다. 모두 아내 덕분이다. 이 기회를 빌려 아내에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사랑하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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