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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3> 무패 전적 태국 선수와 붙어 8회 KO승

군에 가겠다고 연습 한번 하지 않던 그때 매니저가 전화했다. 

“수환아, 태국 가자.” 

“저, 복싱 그만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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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원 줄게, 가자.” 

매니저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60만원 이야기를 했다. 60만원이면 당시 큰돈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럼, 갑시다.” 

‘돈 벌어 엄마에게 땅을 사드리고 복싱을 때려치우자. 그리고 군대 갔다 오자’라고 생각했다. 1973년 2월 7일 상대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합 일자는 2월 9일이었다. 태국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상대가 수코타이 선수였다. 그는 태국 최고의 선수였다. 별명이 무언의 알리(Mute Ali)였다. 

시합은 태국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보코솔 선수와 필리핀의 살라바리아 선수 간 세계 타이틀 매치와 함께 진행됐다. 수코타이는 인기가 높은 데다 태국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나와 수코타이 간 동양 타이틀 매치가 그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메인게임이 됐다.

나는 링에 오르기 전 3회전까지 견디겠다고 각오했다.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하지 않았어도 3회전 9분까지는 버티리라. 그러고 안 되면 내려오겠다.’ 연습은 단 하루도 안 했다. 어차피 지난 일을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링에 올랐다. 태국의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2월과 상반된다. 우리는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여름 날씨 속에 태국민들의 열기를 한몸에 받고 링에 올랐다. 

수코타이의 주먹은 묵직했다. 역시 18전 18승 16KO승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선수였다. 나도 기죽지 않고 ‘너나 나나 3회전 안에 둘 중 하나는 쓰러지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뻗었다. 3회전, 상대도 안 보고 그냥 휘두른 주먹에 수코타이가 다운됐다. 태국 심판은 느리게 카운팅했다. 태국 왕이 관람하는 시합에서 자국 선수를 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다운시켰다. 역시나 느린 카운팅. 수코타이는 몰아치는 연타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필살의 주먹’을 휘둘렀다. 이와 함께 3회전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나도 지쳤다. 휘청거리며 다시 링으로 들어갔다. 숨은 헐떡거렸고 머릿속으로는 남아있는 라운드 수를 셌다. 연습 안 한 것을 그렇게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코타이에게 ‘나를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몸을 맡겼다. 

4회전, 한발 물러나며 받아 때린 오른손 어퍼컷이 적중했다. 수코타이는 한 번 더 다운됐다. 그도 국왕 앞에서 지기는 싫었던지 엄청난 반격을 했다. 내 얼굴도 멍이 들었다. 4, 5, 6, 7회전을 끝내고 코너로 들어오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나, 못하겠어요, 다음에 합시다.” 

매니저가 내게 말했다. “너, 돈 안 줘.” 

“언제는 돈을 잘 줬느냐”며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때리려고 하는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8회전, 나는 그 화를 수코타이에게 풀었다. 결과는 KO승이었다. 이 시합 영상을 보면 맨 마지막에 매니저가 승리한 나를 포옹하려 하는데 내가 밀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합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일어나 얼굴을 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귀국길 공항에서 ‘잠자리 선글라스’를 사서 꼈다. 선글라스를 벗자 비행기 승객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승리의 상처는 누가 뭐래도 좋았다. 아픈 줄도 몰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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