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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밴텀급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2㎏ 더 올려 주니어 페더급에서 힘 좀 써보자.’ 이런 각오로 연습량을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랐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와 싸운다는 건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했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희망을 못 줄지언정 “질 거면서 거기까지 왜 가냐”는 식이었다. 한 선배는 내가 콜롬비아 선수에게 KO로 패했을 때 “일어나서 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안 일어났다”고까지 했다. 복싱이라고는 1회전도 뛰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나.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제재소에서 사온 통나무를 쪼개며 힘을 키웠다. 샌드백이 ‘ㄱ’자로 꺾일 만큼 펀치력도 키워 나갔다. 신도체육관 조순현 관장에게 어깨 힘 빼는 법도 배웠다. 

시합을 앞두고 권투위원회 회장님과 한 제과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지더라도 잘 싸우고 와라. 오렌지 주스 하나 마셔.” 

적지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치르러 가는데 지더라도 잘 싸우고 오라니. 체중 조절하는 선수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하다니….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란 듯이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는 기관총으로 탱크 쏘러 가는 바보다.’ 이를 악물었다.

만나는 상대가 모두 KO승을 자랑했다. 태국 수코타이 18승 16KO승, 자모라 26승 전승 KO승, 카라스키야도 아마추어 전승으로 11승 모두 KO승이었다. 내 승률은 희박했다. 공항에 나온 가족들에게 필승을 다짐하며 비행기를 탔다. ‘이게 마지막 시합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테말라, 파나마로 가는 항로였다. 이기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탱크에 기관총 쏘다 오느냐의 문제였다. 비행기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서 벌어진 동네 복싱시합을 보러 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나와 같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그때까지 47번을 싸우면서 시합마다 경기 전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시합을 마치면 또 산소를 찾았다. 모두 94번이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앞두고도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자마자 “아버지가 그렇게도 예뻐하시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어릴 때 막내 여동생이 집에서 기르던 하얀색 큰 불도그에게 목이 물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고 어린 여동생을 구했다. 이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수환이 순발력이 엄청 빠르네.” 여동생에게 가까이 있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랐다. 

할머니 생각도 났다. 서울 돈암동에서 살 때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항상 책을 읽었다. 표지는 검정색, 옆은 빨간색인 작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하나님 말씀 책”이라고 하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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