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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경의 열매] 홍수환 <12>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


홍수환 장로가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카라스키야전에서 4전 5기로 상대를 다운시킨 모습.


드디어 시합 날. 링 위에서 진행된 계체량을 통과하고 빨리 방에 올라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기에서 내 시합 심판인 미국인을 만났다.

“Hey, soo! I’m the referee. Good luck today(수환, 내가 심판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Thank you, but I’m ready for this fight(고마워요. 나는 준비가 돼 있습니다).”

“Where did you learn English(영어 어디서 배웠어요)?”

“High school(고등학교에서요).”

이 짧은 만남은 기적을 만들었다. 왜 시합 하루 전 룰 미팅 때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을까. 왜 시합 날 엘리베이터에서 심판을 만났을까. 경기가 끝난 이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합을 앞두고 나는 라커룸에서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가 나타났다. “수환아, 오늘 시합 네가 이겨. 상대는 펀치가 세지만 턱은 약해. 너는 펀치가 좀 약해도 대신 맷집이 좋잖아. 자모라 봐라, KO로 졌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 안 쓴다.”

나는 이마에 땀이 약간 흐르도록 몸을 풀고 코트라에서 빌린 우리나라 고유의 삿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링 위에 올랐다. 카라스키야도 등장했다. 초록색 가운을 입고 올라온 그의 모습은 이미 챔피언이었다. 애국가가 흐르고 결전의 시간이 왔다. 복싱 선수에게 언제가 제일 긴장되는 순간일까. 바로 ‘세컨드 아웃’이다. 선수 둘만 남으라고 할 때다.

“수환아, 5회전만 넘기면 이 싸움은 네 거다.”

조순현 선생님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링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상대 상체 놀림이 부드러웠다. 주먹도 생각했던 대로 빠르고 가벼웠다. 그리고 강했다. 이제껏 상대를 5회전 안에 모두 보내버린 그런 주먹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다. 5회전 안에 끝내자. 그게 편하겠다.’ 그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1라운드는 잘 싸웠다. 운명의 2라운드. 상대의 전광석화 같은 왼손이 나올 때 나는 라이트훅으로 응수했다. 아뿔싸! 상대가 오른손 어퍼컷과 왼손 훅으로 나를 받아쳤다. ‘걸렸구나!’ 링 밖에서 선생님이 외쳤다. “침착해!”

나는 이미 링 바닥에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쓰러졌다. 그 정도 되자 파나마 관중은 게임이 이미 끝난 줄 알고 축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심판이 나를 살렸다. 카운트를 천천히 셌다.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때 종이 울렸다. 2회전 끝.

종소리를 듣고 겨우 코너로 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꺼내 마시게 했다. 미제 군용 암모니아였다. “정신 나게 하는 거다.” 너무 독해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쭉 마셔. 1회전만 더하고 하지 마!”

‘그래, 1회전만 더하고 그만하자.’ 그러고 나서 앞을 보니 상대 코너의 링 줄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신이 좀 든 것이다.

“1회전만 하고 관둬.” 선생님이 또 외쳤다. 선생님은 눈물을 참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릴 기세였다.

“세컨드 아웃.”

선생님은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링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래. 총을 맞더라도 등에 맞지 말고 앞가슴에 맞고 전사하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소가 너를 받는 게 아니야. 네가 겁먹으니까 소한테 받히는 거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겁이 나를 죽이는 거야. 네 주먹 별거 아니야.’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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