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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5> 가사하라 상대로 방어전… 시합 직전 설사로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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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7. 9. 2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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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사하라 선수와의 시합에 대비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때까지 일본 선수와 13번 싸워 12번 이기고 한 번은 일본 규슈에서 하라다 선수에게 졌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76년 11월 서울에서 멋지게 이겼기 때문에 아직 진 적이 없다고 늘 생각했다.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기자회견 할 때 한 기자가 가사하라 선수가 나온 신문기사를 보여줬다. 가사하라가 자기 아버지 묘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실렸다. 나는 ‘아버지 묘지에 94번 찾아갔는데 당신은 몇 번이나 갔겠나’라고 생각했다. 

시합 날 아침 계체량을 통과하고 주스를 마셨다. 아침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설사를 시작했다. 형에게 이야기했다.  

“형, 내 말만 들어. 나 지금 먹는 대로 설사해. 조순현 선생님 좀 불러줘요.”

선생님이 내 방으로 오셨다. “왜 그래, 수환아.” 

“선생님, 제가 이제껏 복싱하면서 이런 적은 없었어요. 먹는 대로 나옵니다. 그러니 커피숍에 좀 있다가 내려갈게요. 밥 잘 먹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게요.” 

“그렇지. 절대 내색해선 안 돼.”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연했다. 후배에게 호텔 방으로 몰래 약을 사오게 했다. 설사 멈추는 약, 초록색 알 6개였다. 약을 먹으면 설사가 당장 멎는다고 했다. 약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설사가 멎었다.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니 멈추었겠지만.  

“할아버지, 손자가 할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설사를 합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먼 파나마에서 가져온 챔피언 벨트를 일본에 풀어줘서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이 시합 이겨야 합니다. 제발 힘을 주세요. 힘을.”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열심히 바란 적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신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할아버지를 불렀다. 

시합 장소는 일본 전통씨름장. 겉으로는 밝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설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아팠다. 무척 아팠다. 링에 올라가며 나는 속으로 계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았다.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이 손자가 갚게 해주세요.” 

1회전이 시작됐다. 그는 나를 잡지 못했다. 2회전에서는 원투로 다운을 빼앗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미국 심판 마틴 던킨은 완전 친일파였다. 다운된 선수를 세우다시피 하며 말을 붙였다. 파나마에서 내가 심판의 도움을 받아서일까. 이젠 정반대가 됐다. 

5회전에서도 다운을 빼앗았다. 코너에서 받아 때린 주먹이 적중했다. 그런데 힘이 빠져 갔다. 허벅지에 쥐가 났다.  

‘할아버지, 지금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닙니다’라며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가사하라는 끈질겼다. 몇 번의 주먹을 제대로 맞고도 버텼다. 가사하라가 비틀거리면 심판은 가운데 끼어들어 내 공격의 맥을 끊었다. 8회전이 끝났다. 몸은 지쳐갔다. 운명의 9회전. 가사하라가 내 상태를 알았는지 끝까지 덤볐다.  

9회전 중반 그는 사력을 다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연타 다섯 대가 차례로 상대의 목과 턱에 적중했다. 그는 로프 밖으로 머리가 빠지면서 다운됐다. 심판은 카운트를 느리게 하는 것 같았고 가사하라는 다시 일어났다. 가사하라에게 접근해 연타를 치려는데 공이 울렸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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