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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가 누군지 오늘 알았네.

지금 현장에선/최근 나의 관심사

by 뻥선티비 2012. 7. 2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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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식하다. 자랑은 아니다. 부끄럽다. 하지만 낙담은 말자. 모르는 것을 오늘 알면 되지 않겠나. 오늘 한 교계언론의 글에 헨리 조지가 나왔다. 헨리 조지 듣기는 여러번 들었겠지. 하지만 몰랐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간결하게, 간결한 문체로 정리한 글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잘된 글이었다. 글쓴이가 시인인데, 시인 맞네 싶었다. 이 글에 헨리조지가 나왔다. 나를 위해, 또 다른 무식한 나를 위해 몇자 정리해 둔다.

 

 

헨리 조지는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 단일세를 주장했다. 경제가 진보해도 빈곤할수 밖에 없는 것은 땅을 가진 지주들이 불로소득을 얻기때문이다,  그 불로소득만큼 세금을 거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유는 이렇다. 사람이 많아지면 토지의 가치가 올라간다. 노동자는 이 토지를 이용하기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지만 그 결과는 땅값만 증가시킨다. 지주의 부만 늘려준다. 이는 불로소득이고, 이를 세금으로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헨리 조지의 삶.

그는 아버지 사업 실패로 극도의 가난속에서 살았다. 14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점원, 심부름꾼 등 온갖 잡일을 했다.

 

그는 그 와중에 독서를 했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됐다. 26세때 그는 한 신문사의 인쇄공이었다. 당시 링컨대통령의 암살소식을 접한 그는 격분해 열정적인 추도문을 썼다. 그 역시 노예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었다.

 

헨리 조지는 이 추도문을 자신이 일하는 신문에 기고했고, 이 글은 그 신문의 머릿글로 실렸다. 이 글이 인쇄공의 글이라는 것을 안 신문사 편집인은 그를 기자로 발탁했다.

 

19세기 후반 당시 미국은 공업화로 급속히 발전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빈부의 격차도 커졌다. 나라는 발전했지만 가난을 해결하진 못했다.

 

헨리 조지는 그 원인이 토지제도라고 깨달았다. 이를 정리한 것이 '진보와 빈곤'이다.

책은 대박을 쳤다. 1873~78년 대공황에 처한 사람들의 불만을 잘 묘사했기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당시 토지문제가 심각했던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취재와 강연을 했다. 그는 달변가였다. 수많은 청중을 열광시켰고 지지자를 얻었다.

 

영국은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 두차례나 체포했다. 이것이 세계적인 뉴스가 됐고, 그는 미국의 저명인사가 됐다.

 

책은 10여개 외국어로 번역됐고, 논픽션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 그는 명강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지대 공유제 운동이 확산되자 기득권 층의 반발도 커졌다.

헨리 조지는 미국에 지대 공유제를 알리기 위해 애썼다. 47세대 뉴욕 노동조합 연합의 추대를 받아 뉴욕시장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57세때 다시 출마했다. 강연과 집필로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했다. 의사는 죽을수도있다며 시장 출마를 만류했다. 결국 헨리 조지는 선거기간중 운명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중국의 쑨원은 이를 기초로 삼민주의 중 민생주의 핵심적인 토지정책을세웠다.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는 이 사상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헨리 조지의 신앙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에 기초한다.

 

그의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맥글린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고인은 단순히 철인이나 현인이 아니었습닏. 꿰뚫어 보는 자요, 선구자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스승이었습니다. 고인에 대해 다음과같은 성경 구절로 비유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게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림이 있으니 이름이 요한이라.' 제가 감히 성경을 본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헨리 조지라."

 

이 조사가 읽힐때 장례식에서는 유례없는 자발적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10만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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