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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3> 무패 전적 태국 선수와 붙어 8회 KO승

군에 가겠다고 연습 한번 하지 않던 그때 매니저가 전화했다. 

“수환아, 태국 가자.” 

“저, 복싱 그만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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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원 줄게, 가자.” 

매니저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60만원 이야기를 했다. 60만원이면 당시 큰돈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럼, 갑시다.” 

‘돈 벌어 엄마에게 땅을 사드리고 복싱을 때려치우자. 그리고 군대 갔다 오자’라고 생각했다. 1973년 2월 7일 상대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합 일자는 2월 9일이었다. 태국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상대가 수코타이 선수였다. 그는 태국 최고의 선수였다. 별명이 무언의 알리(Mute Ali)였다. 

시합은 태국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보코솔 선수와 필리핀의 살라바리아 선수 간 세계 타이틀 매치와 함께 진행됐다. 수코타이는 인기가 높은 데다 태국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나와 수코타이 간 동양 타이틀 매치가 그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메인게임이 됐다.

나는 링에 오르기 전 3회전까지 견디겠다고 각오했다.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하지 않았어도 3회전 9분까지는 버티리라. 그러고 안 되면 내려오겠다.’ 연습은 단 하루도 안 했다. 어차피 지난 일을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링에 올랐다. 태국의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2월과 상반된다. 우리는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여름 날씨 속에 태국민들의 열기를 한몸에 받고 링에 올랐다. 

수코타이의 주먹은 묵직했다. 역시 18전 18승 16KO승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선수였다. 나도 기죽지 않고 ‘너나 나나 3회전 안에 둘 중 하나는 쓰러지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뻗었다. 3회전, 상대도 안 보고 그냥 휘두른 주먹에 수코타이가 다운됐다. 태국 심판은 느리게 카운팅했다. 태국 왕이 관람하는 시합에서 자국 선수를 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다운시켰다. 역시나 느린 카운팅. 수코타이는 몰아치는 연타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필살의 주먹’을 휘둘렀다. 이와 함께 3회전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나도 지쳤다. 휘청거리며 다시 링으로 들어갔다. 숨은 헐떡거렸고 머릿속으로는 남아있는 라운드 수를 셌다. 연습 안 한 것을 그렇게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코타이에게 ‘나를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몸을 맡겼다. 

4회전, 한발 물러나며 받아 때린 오른손 어퍼컷이 적중했다. 수코타이는 한 번 더 다운됐다. 그도 국왕 앞에서 지기는 싫었던지 엄청난 반격을 했다. 내 얼굴도 멍이 들었다. 4, 5, 6, 7회전을 끝내고 코너로 들어오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나, 못하겠어요, 다음에 합시다.” 

매니저가 내게 말했다. “너, 돈 안 줘.” 

“언제는 돈을 잘 줬느냐”며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때리려고 하는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8회전, 나는 그 화를 수코타이에게 풀었다. 결과는 KO승이었다. 이 시합 영상을 보면 맨 마지막에 매니저가 승리한 나를 포옹하려 하는데 내가 밀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합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일어나 얼굴을 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귀국길 공항에서 ‘잠자리 선글라스’를 사서 꼈다. 선글라스를 벗자 비행기 승객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승리의 상처는 누가 뭐래도 좋았다. 아픈 줄도 몰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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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1966년 6월 25일 나의 복싱 영웅이 탄생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그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별로 없던 시대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다니던 중앙고 보이스카우트 행사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TV로 봤다. 그다음 날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도 갔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복싱을 좋아하는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를 가져다 놓겠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마추어 시합에 두 번 나갔다. 두 번 다 졌다. 바로 프로무대에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김준호 선수가 내 아마추어 경기를 보고 조언도 해줬다. 

69년 5월 10일 대구 출신 김상일 선수와 겨뤘다. 경험이 많은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첫 프로경기에선 무승부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합은 서울 청량리 신도체육관 소속 최창배 선수와 만났다. 그때 심판 전원일치로 첫 승을 거뒀다. 1승을 한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지지했다. 

당시 한국 밴텀급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나는 이를 놓고 부산 출신 문정호 선수와 결정전을 가졌다. 5회에서 라이트 어퍼컷과 훅의 연타로 KO승을 거뒀다. 데뷔 1년도 안 돼 한국 챔피언이 된 것이다. 

복싱 판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밴텀급 챔피언은 멕시코의 괴물 올리바레스 선수였다. 동양 챔피언은 일본인 가네자와 선수였다. 이 둘이 세계 타이틀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됐다. 

나는 필리핀 알 디아즈와 결정전을 벌였다.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였다. 이 시합에서 나는 판정으로 이겼다. 정말 갑작스레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까지 거머쥐게 됐다. 

패배도 있었다. 1970년 6월 9일 일본 원정 시합에서의 첫 패배는 한이 됐다. 상대는 일본의 파이터 하라다 선수 동생이자 당시 세계 밴텀급 랭킹 4위였던 우시와카마루 하라다 선수였다. 일본 규슈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아깝게 판정으로 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선수를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불러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완벽 승리였다. 그 선수가 병원에 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는 방송 카메라의 관심을 받았다. 

엄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인천 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안에서 카투사 식당을 했다. 엄마는 버터와 치즈를 허리춤에 차고 나와 내게 주셨다. 나는 버터를 좋아했다. 엄마가 주는 버터를 밥에 비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자식사랑은 대단했다. 나뿐만 아니고 4남3녀 모두에게 말이다.

그즈음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동양 챔피언이 됐으면 복싱선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미군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론 취했다. 그동안 연습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연습은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복싱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매니저가 알고 내게 전화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사실 오늘날 홍수환을 만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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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6·25전쟁 중 교회서 태어나

나는 챔피언이다. 복싱으로 한국·동양·세계 챔피언을 다 해봤다.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과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등 두 체급을 한국인 최초로 석권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15회 판정으로 이기고 어머니에게 전한 이 말이 한동안 회자됐다. 어머니는 그때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감격했다.  

‘4전5기’의 주인공.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결정전에서 상대를 3회 KO로 눌렀다. 4번 다운되고 일어나 이겼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고백하지만 내가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긴 경기들이었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나는 1950년 7월 11일 6·25전쟁 때 지금 서울 장충동 신광교회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나보고 ‘전쟁통에 폭격이 심한 날 교회에서 너를 낳았지’라고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독실했다. 돋보기를 내려쓰고 성경을 읽던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는 ‘제2교회’를 섬기셨다. 그 교회를 지을 때 못을 박으며 같이 지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후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의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34세 때였다. 할머니는 홀로 큰고모,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작은 고모 이렇게 넷을 키우셨다.


어릴 때 내가 복싱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복싱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관심이 많았다. 우리 동네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87번지였다. 지금 서울경찰청 맞은편이다. 나는 수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앞집에 복싱 선수가 이사를 왔다. 바로 김준호 선수였다. 아버지는 그의 엄청난 팬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김 선수의 복싱 시합을 보러가곤 했다. 김 선수가 1974년 남아공에서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김 선수와 호형호제하던 아버지는 복싱을 사랑했다. 김 선수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던 날 섭섭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김 선수의 아들은 수송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 친구와의 작별도 참 아쉬웠다. 

아버지는 1964년 8월 4일 아주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와 같이 마루에서 주무셨는데 심장마비였다. 내가 열네 살로 중앙중학교 2학년일 때였다. 등굣길에 복싱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에 앉아 “어, 우리 육사생도 들어오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남대문시장 입구에 있는 한 가게에 미제 복싱 글러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했고 모은다고 모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 글러브를 보면서 돈을 다 모으기 전에 누가 사가면 어쩌나 싶었다. 그리고 멀리 그 가게의 복싱 글러브를 보면서 ‘아직 안 팔렸구나’라고 마음 놓으며 집으로 향하던 생각도 난다. 

정리·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50년 서울 출생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밴텀급·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WBA 주니어페더급 전 챔피언 △KBS 전 복싱 해설위원 △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현 구리 예빛교회(홍수철 목사)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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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 탐방-태영건설 기독선교회] 회원 대부분 성령 체험한 독실한 신자… 우상숭배 고사 관행 없애


태영건설 기독선교회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태영건설 본사 13층 회의실에서 목요 정기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20여명이었지만, 이들의 “아멘” 소리는 유독 컸다.

설교자로 초청된 남회우(서울 성도교회) 목사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았다. 십자가에 집중한다면 선교회도 더 크게 부흥할 것”이라고 했다.

선교회 리더 박종철(48) 상무는 예배를 마친 뒤 “회원 대부분이 성령을 체험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며 “몇몇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치 ‘위장취업’한 것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선교회는 1994년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시작했다. 당시 여의도에 있던 자회사 SBS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95년 본사가 마포로 이전한 후엔 같은 건물에 입주한 꽃집 사장,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도 함께 모였다.

건설사 직원들은 대개 현장에 있다. 전체 직원이 계약직을 포함해서 1200여명이지만 본사에는 250여명이 근무한다. 예배에는 25명 정도가 모였다.

본사는 2007년 여의도로, SBS는 목동으로 옮겼다. 이후 선교회 인원은 크게 줄었다. 2명, 3명이 모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예배를 멈춘 적은 없었다.

2014년 말엔 ‘영적인 공격’도 받았다. 회사 감사팀이 “회사 공간에서 사적인 모임을 한다” “회사에 피해를 주는 것 아니냐”며 사내 종교활동 금지를 통보했다. 독실한 박 상무와 당시 안전팀장이 건설 현장에서 자주 벌어지는 고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고사를 지내는 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며 고사를 막았다. 건설업계는 우상숭배가 심하다. 공사 착공땐 ‘안전기원제’, 공사 중간과 마지막에도 반드시 고사를 지낸다.

박 상무는 “그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며 “이미 은퇴한 이재규 사장이 다시 오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전했다. 이 사장은 “종교 편향이 아니다. 첨단 시대에 고사가 웬 말이냐. 어디서든 고사를 지내면 엄중히 문책을 하겠다”는 공문을 내렸다. 선교회의 기도와 결단으로 고사관행이 없어진 것이다.

선교회는 거의 매일 모인다. 월·화요일엔 선교회 리더가 회원들을 심방한다. 수요일엔 기도모임, 목요일엔 정기예배를 드리고 저녁엔 성경공부를 한다.

10년 전부터는 1년에 1∼2회 ‘성경알기 캠프’도 열고 있다. 새 회원을 대상으로 6주간 저녁마다 2∼3시간씩 성경을 가르친다.

글·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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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신우회 탐방- 40년 전 군사독재시절 눈치보며 시작

KBS기독신우회는 창립한 지 40년 됐다. 1977년 3월 2일 당시 한동수 회원 등 5명이 ‘KBS성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군사독재 시절로 서너 명만 모여도 눈치가 보이던 때였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극동방송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89년 ‘KBS기독신우회’로 개칭했다.

지난 4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어린이합창단실에서 열린 예배에는 30여명이 참석했다. 김은수(서울 온사랑의교회) 목사가 설교를 했다. 예배 후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김영미(전략기획실 디자인 전문위원) 직전 신우회장은 80년대 초반 신우회 분위기를 전했다. “당시는 삶이 팍팍해 회원들 모두 하나님을 더 의지했어요. 한 영혼을 전도하려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한 번은 ‘누가 거듭나려고 하니까 중보기도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회원 10명은 누군지도 모르고 무조건 기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통근버스에서 얼굴빛이 확 달라진 한 선배를 만났어요. 분위기가 냉랭해 6개월간 말도 못 붙였던 선배였는데 예수님 믿고 달라진 거였어요. 그분이 빚 때문에 몹쓸 생각까지 했다고 하더라고요.”

초기엔 수요일만 빼고 매일 모였다. 월요일은 KBS 별관, 화요일은 ‘라디오 녹음실’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목, 금요일엔 성경공부를 했다. 토요일엔 정기예배를 드렸다. 주5일 근무 이후 정기예배는 금요일에 드리고 있다.

회원들은 방송을 통해 예수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최근 성탄특집 다큐로 순교자들이 방영된 것도 이들의 수고 때문이었다. 신우회원 권혁만 PD가 2013년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 2015년 ‘일사각오 주기철’을 제작했다. 올해는 강지원 PD가 ‘캄보디아 헤브론 선교병원의 심장병 수술’ 편을 제작하고 있다. 현재 제작비가 모자라 이를 놓고 회원들이 기도하고 있다.

선교사도 많이 배출했다. 케냐에 파송됐다가 지금은 한국 머시쉽 대표인 권현순, 중국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요나, 잠비아 조남설 선교사 등이 직장을 그만두고 헌신했다. 길호갑 선교사는 퇴직 후 터키로 파송됐다. 탤런트 차태현의 아버지로 음향효과를 담당하다 퇴직해 AD농어촌방송선교회를 세운 차재완 서울 충신교회 장로도 신우회원이었다.

신우회는 또 안아브라함(멕시코) 조재숙(탄자니아) 서혜경(부르키나파소) 구한별(일본) 손옥순(독일) 최하진(중국) 등을 협력 선교사로 후원하고 있다.

강수길(편성본부 부장) 신우회장은 “그동안 항상 동행하신 하나님, 기도로 동역해 주신 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글=전병선 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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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더위 모르고 지냈어” 피서지가 된 교회들

이젠 한풀 꺾였지만 올여름 평균 최고기온은 30도를 육박할 정도였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6∼7월 전국 평균 최고기온은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29.1도였다. 폭염은 ‘침묵의 살인자’로 불린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폭염은 치명적이다. 이런 어르신들에게 올여름 여러 교회가 평일에도 교회 문을 활짝 열고 무더위 쉼터를 마련해 섬겼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물론 각종 간식과 놀거리를 제공한다. 

낮 최고기온이 32도를 웃돈 지난 9일 인천 해인교회(김영선 목사)의 무더위 쉼터를 찾았다. 교회 3층 132㎡(40여평) 공간에는 80∼90대 할머니 9명이 있었다. 2명은 긴 통에 화살을 던져 넣는 투호놀이를 했다. 몇몇은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쉼터에는 에어컨 한 대가 26도에 맞춰져 있었다. 곳곳에서 선풍기 5대가 돌아갔다. 김영선 목사는 “에어컨은 한 대지만 아침부터 틀고 선풍기도 같이 돌리기 때문에 충분히 시원하다”고 말했다.

이번 여름을 어떻게 지내셨냐고 묻자 이정희(82) 할머니는 “우린 올여름을 교회에서 났다”며 “덕분에 더운 줄 모르고 잘 지냈다”고 답했다. 변선분(84) 할머니는 “너무 더웠는데 이곳을 알고부터 줄곧 여기에 와 있다”며 “아침 일찍 와서 저녁 늦게 잘 때나 간다”고 했다. 

교회는 6년 전부터 7월 말∼8월 셋째 주까지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노인들을 폭염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교회는 ㈔인천내일을여는집을 설립해 결식아동과 결식노인에게 무료급식을 하고 노숙인 쉼터도 운영한다. 

교회는 간식으로 과자와 빵, 음료수를 내놨다. 지난해부터 이곳을 이용한다는 최은정(80) 할머니는 “때 되면 밥 주지, 간식 주지, 하루 종일 시원하지, 여기가 천국”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여기 오시는 분들이 ‘우리가 너무 호강하는 것 같다’고 하신다”며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민망하다”고 수줍어했다. 그는 “큰일 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에어컨 하나 틀어주는 것”이라며 “오히려 별로 준비한 게 없는데 맛있게 드시고 편하게 계시니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고령층은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에 취약하다. 보건 당국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12∼2016년) 온열질환자는 총 5910명으로 이 가운데 50대 이상이 전체의 56%를 차지했다. 치명률도 높다. 5년간 온열질환으로 숨진 사람은 58명이며, 60대 이상이 35명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전국에 무더위 쉼터 4만2000여개를 마련했다. 이 중 종교시설은 48개뿐이지만 46곳을 교회가 제공한다. 사실 교회는 정부 정책과 상관없이 이웃을 섬기기 위해 무더위 쉼터를 운영한다. 해인교회도 그런 경우다. 


지난 11일에는 서울역 인근 쪽방촌 주민을 대상으로 무더위 쉼터를 운영하는 서울 모리아교회(윤요셉 목사)를 찾았다. 165㎡(50여평) 예배당은 노인 20여명으로 북적였다. 에어컨 3대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족욕을 하는 이도 있었고 안마기에 앉아 안마를 받는 이도 있었다. 한쪽에선 교회가 마련한 오리백숙을 먹었다. 인근이 동자동 쪽방촌이다. 2200세대가 있고 이 중 800세대가 70세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창문도 없는 방에서 선풍기로 여름을 지낸다. 

노희순(93) 할머니는 “요즘 더워서 살 수가 없었는데 이런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교회는 예배당을 쉼터로 개방하고 점심과 간식을 주고 기독교 영화도 보여준다. 윤 목사는 “선선해지면 우린 겨울 쉼터를 준비한다”고 말했다. 

인천·서울=글·사진 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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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공생애·바울 사도 생애 16년만에 16시간 짜리 드라마로

㈔한민족문화예술재단 이윤연(60) 회장이 예수 공생애와 바울 사도의 생애를 오디오 다큐드라마로 만들었다. 2001년에 시작해 16년 걸려 완성된 ‘힐링 지저스’다.

예수 공생애는 신약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삶을 다뤘으며 10부작 10시간 분량이다. 세번째 녹음한 결과물이다. 2015년까지 두 번 녹음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며 폐기한 후 다시 작업했다.

바울 사도의 생애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첫 순교자 스데반 이야기부터 바울 본인의 순교까지를 담았다. 바울 서신서를 중심으로 만든 12부작 6시간 분량이다. 이번에 두 작품이 각각 CD 10장, 7장에 담겨 출시됐다. 

이 회장은 성우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서울 동신장로교회(서해원 목사) 장로다. 1983년 MBC 공채 성우로 입사해 ‘PD수첩’ 예고 방송 담당자, 라디오 생방송 ‘홈런출발’을 진행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애틀란타 한인텔레비전 뉴스 앵커 등을 했다. 

이 회장은 “2001년 미국 9·11 테러 이후 한국에 돌아오느냐를 놓고 기도할 때 한국에 가서 예수 드라마를 만들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부터 성경을 기준으로 드라마 원고를 썼다.

어려움은 많았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예수처럼 영성 있는 목소리 찾기가 힘들었다. “그냥 대본을 연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예수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어요. 각종 드라마에서 예수 역할을 했던 성우들을 데려와 녹음했지만 상업적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래서 두 번이나 녹음한 것을 폐기한 겁니다.” 

그는 이로 인해 괴로워하며 오랜 시간 기도했다. 그 와중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생각이 떠올라 신인을 수소문했다. 장성호라는 성우를 섭외해 함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6개월 만에 녹음을 마쳤다. 

이 회장은 “이 드라마를 통해 성도가, 교회가, 한국사회가 힐링되기를 소망한다”며 “이를 위해 주요 교단과 함께 각 가정에 힐링 지저스 보급 운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로도 제작해 미국 유럽 아프리카 중국 등에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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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에는 교회와 성가대, 300명의 기도용사가 있었다

대한민국 경찰청에는 기독교와 관련해 특별한 세 가지가 있다. 예배 처소인 교회가 따로 있고, 교회 내 성가대가 있으며, 300명의 기도용사가 있다.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경찰청 본청을 찾았다. 국내 치안을 총책임지는 중앙행정 기관인 만큼 일일이 신원 확인을 하고서야 출입할 수 있었다. 건물 14층엔 ‘경찰청교회(박노아 목사)’가 있었다. 장의자가 20여개 놓여 있었고 벽면엔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이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수요예배, 주일예배, 목요기도회가 열린다고 했다.

교회에선 수요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설교는 교경중앙회 부회장 김명철(서대문성결교회) 목사가 맡았다. 이에 앞서 성가대가 찬양을 불렀다. 25명으로 구성된 ‘하나멜 찬양대’도 특별했다. 직장선교회 예배 때 성가대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경찰청선교회 총무인 정두형(본청 보안국) 경위는 “전국에 지방경찰청 4곳, 경찰대학 등 교육기관 4곳, 경찰서 252개가 있고 대부분 각각 선교회가 조직돼 있지만 성가대가 있는 곳은 본청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하나멜 찬양대의 ‘하나멜’은 ‘하나님 찬양 멜로디’의 줄임말이다. 1981년 6월 본청 설립과 함께 교회가 세워지면서 조직됐다. 경찰청에 근무하는 경찰관, 행정관 등이 성가대원으로 매주 월요일, 화요일에 연습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도용사 300명’이다. 본청 선교회원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본청은 물론 전국 경찰관서에서 일하는 기독 경찰관 및 행정관 300여명으로 한국경찰기독선교연합회(한경연) 소속 회원들이다.  

이들은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연결돼 중보기도를 한다. 이 방에 있는 332명은 1년 365일 나라와 민족, 세계 열방을 위해 아침 점심 저녁에 릴레이 금식기도를 한다. 이 카톡방은 한경연 실무 총무 윤신자(서울경찰청) 경위가 2014년 7월에 만들었다. 

당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기도회를 했고, 이 기도회에 세월호 사건으로 밤샘근무를 한 경찰관들도 참석했다. 윤 경위는 이들을 보고 ‘정말 기도가 필요할 때’라며 기도용사 30명을 처음 모았다. 한경연 총무 박상수(서울 노원경찰서) 경위는 “경찰들이 무섭게 보이지만 의외로 섬세하고 독실하다”고 웃었다.

경찰청 교회는 기타교실도 운영한다. 경찰청 선교회장 한종욱(본청 외사국) 총경이 비기독인 2명을 포함해 10명에게 기타를 가르친다. 모두 전도를 위해서라고 했다.

글=전병선 기자, 사진=신현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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