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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4) 예수 영접한 아버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 육신의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형제들은 3일간 금식했다. 아버지는 눈을 뜨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시다 3개월 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전도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전도하라고 했다. 그것이 효도라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고 일단 열심히 기도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선생님은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전도는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 나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말을 하기로 정한 그날 나는 아침과 점심을 금식했다. 작전도 세웠다. ‘저녁식사 중에 말을 꺼내자. 한마디만 하자. 아버지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가요.’ 칼국수를 먹었는데 처음에는 입이 안 떨어졌다. ‘그래 30번 세고 말하자. 그래 50번 세고 말하자. 100번만 세고 말하자’며 스스로 독려했다. ‘그래 순교는 아주 복되다는데 내가 전도하다 아버지에게 맞아 죽으면 그것도 복이겠지’라고 위로도 했다.

그리고 큰마음 먹고 “아버지, 예수 믿고 천국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순교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은 ‘형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주변이 조용했다. 폭풍전야였다. ‘밖으로 나를 집어던지실까,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실까, 몽둥이찜질로 이어질까’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집 빚을 다 갚으면 엄마하고 같이 갈게.” 기적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하나님, 그 빚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빨리 갚아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아버지는 이후 7년이 지나서야 교회를 가셨다. 빚을 갚아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아버지가 며칠 못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굿을 했고, 절에 가서 불공을 했다. 절망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큰누나가 말했다. “지옥 가면 고생하고 너무 힘들대. 엄마, 우리 아버지 모시고 교회 한번 갑시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이 시무하던 서대문교회에 갔다. 생애 첫 예배를 드린 아버지는 “여기가 천국이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몇 달 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 큰누나,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처럼 꾸며 택시를 탔다. 어머니는 수술도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래도 수술은 한번 받게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겼다. 우리는 전북 정읍으로 가는 길에 전주예수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큰형이 공연히 난리를 피웠다. 우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큰누나는 먼저 인근 교회의 전도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또 앞으로 3일간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기도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때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눈을 뜨셨다. 가족들은 모두 방언이 터졌다. 아버지가 눈을 뜨자 큰누나는 “아버지, 일어나세요. 기뻐하며 찬양합시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집안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때 도망가지 않고 남은 당숙에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네. 동생, 누가 뭐래도 예수님 잘 믿게.”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3개월을 더 사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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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3) 제삿날 덥석 무릎 꿇고 기도하자 온 집안 ‘발칵’


독실한 불교 집안을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거듭나게 한 이는 큰누나였다. 누나는 돈을 벌려고 도시에 나갔다가 복음을 접했다. 가끔 집에 들러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 어른들이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들은 건드리지 마라.” 그렇다고 동생들을 가만히 놔둘 누나가 아니었다. 큰누나는 가족 중에 가장 먼저 나를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데려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바로 윗동네에 사는 큰집 어른들이 쫓아왔다. 집안이 망한다는 둥, 동생을 망쳤다는 둥,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정작 누나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내 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교회에서 들은 지옥 이야기가 너무나 무서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친인척 중에는 주지 승려가 있었고 어머니는 보살이었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대웅전에 올려놓고 좋은 승려를 만들겠다고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나는 극락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극락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국에 가고 싶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손가락만한 구더기가 몸을 뒤덮고 파먹는다는 이야기는 끔찍했다. 생생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구더기였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이것이 가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1년간 교회에 다니면서 집요하게 질문했다. 왜 부처가 아닌 예수만 믿어야 천국에 가는지 등의 의문점을 물고 늘어졌다. 어른들이 모이는 구역예배에도 참석해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것은 다 물었다. 그러면서 확신이 들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부모님을 전도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탄이 방해했다. 아버지는 내가 주일에 교회에 못 가게 밭일을 맡겼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일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맡은 일을 하다가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면 몰래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리 집의 반대는 그런대로 무시할 수 있었다. 문제는 큰집의 반대였다. 큰집은 딸만 있었기 때문에 나를 양자로 삼았다. 대를 이을 장손이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은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더더욱 반대했다. 제사를 주도해야 할 장손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앞으로 제사상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나는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로 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이후에 많이 자책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삿날이 다가왔다. 결심은 했지만 절을 안 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는데 큰아버지가 “석봉아, 인사드려라”라고 준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절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서 있는 편을 택했다. 선 채로 호되게 야단맞고 그날은 지나갔다. 

또 다른 제삿날이 왔다. 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버렸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큰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놔둬라. 이미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니 제삿밥 얻어먹기는 틀렸다.” 그 다음부터는 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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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2) 가난한 열네살 소년 “아이스케키 사세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3개월 가까이 울었다. 결국 일을 배우기로 했다. ‘기술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려다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기술자 밑에서 ‘시다바리(조수)’를 하다 얻어맞기만 했다. 초등학교만 나온 14세 청소년이 겪는 사회생활은 밑바닥 순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을 따라 경기도 성남으로 갔다. 형님이 일하러 가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2주 동안 연습한 것 같다. “아이스케키, 5원에 얼음과자 2개.” 돈도 벌어 좋았지만 아이스케키 가게에서 주는 비빔국수가 아주 좋았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비 오는 날은 장사하기 가장 나쁜 날이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기도 전에 녹아서 흘러내렸다. 우리는 안 녹은 것처럼 보이려고 빨아 먹어 가며 아이스케키를 사라고 외쳤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술을 배워야지 밥 먹고 산다”며 나를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 넣었다.

요즘은 자동차정비 학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기술자 밑에서 배웠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혹독하게 다뤘다. 정비공장에는 내 또래가 다섯 명 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공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잘못 가져오면 그 공구를 사람에게 던졌다. 바닥에 던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던졌다. 사람을 맞췄다.

저녁에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면 온몸이 파랬다. 다들 똑같았다. 멍이 든 몸을 서로 보며 서러워 울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군말 없이 일했다. 월급은 없었다. 그저 비누 값 정도만 받았다. 우리가 아니어도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 일과를 끝내고 청소를 할 때였다. 카바이드(탄화칼슘 덩어리)로 용접을 한 이후에는 카바이드 용접기 통을 비우고 깨끗이 닦아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 통을 청소하다가 그날 배수구가 막혔다. 카바이드 찌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이 역류해 바닥이 엉망이 됐다. 이를 알게 된 공장장은 “니들 다 죽었어”라고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변에 있는 공구들을 던졌다. 쇠뭉치가 달린 고무호스도 휘둘렀다. 또래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나만 얼떨결에 남았다. 그리고 그 호스에 등을 맞았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죽은 것처럼 바닥에 뻗었다. 공장장은 그런 나를 발로 밟았다. 나는 살겠다고 몸을 움직여 자동차 밑으로 피했다. 이어 화장실로 숨었다. 그날 도대체 어떻게 집에 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1시간 이내의 거리를 거의 서너 시간 걸려 기어갔던 것 같다. 이를 안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경찰서에 가서 공장장을 고소했다. 공장장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공장장은 이튿날 멀쩡하게 출근했다. 알고 봤더니 공장장의 형님이 경찰서장이었다. 결국 내가 정비공장을 그만뒀다.

소득은 있었다. 1년 반 정도 있으면서 산소용접 기술을 배웠다. 나는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가서 세차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혹사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임은 내가 교회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교회에 갔다 오면 긴 용접봉으로 나를 많이 때렸다. 그나마 사장님은 나를 잘 봤다. 어린애가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 것 같다. 나 먹으라고 생선을 사서 끓여주곤 했다. 그러나 그 세차장도 선임기술자 때문에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때 다닌 교회가 인천 숭의감리교회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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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1)'토스트 노점상' 창업 3년만에 연 매출 1억원을


내가 ‘노점상 연봉 1억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누가 뭐래도 아내 하영숙(55) 덕분이다. 1997년 내가 경기도 안양 성결대 목회학과를 졸업했을 때 아내는 “공부를 마쳤으면 이제 돈을 벌어오라”고 내 어깨를 떠밀었다. 교육전도사로 받는 사례 10여만원 말고 진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아내는 “오늘부터 나는 일을 안 할 거야. 1주일 후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져”라고 잘라 말했다.


그때까지 가정경제는 아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과 용접 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결혼 전에는 유치원 교사를 했고, 결혼 후에는 돈 없는 나를 대신해 놀이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다.

아내는 돌보던 아이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하나 내밀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2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중고 스낵카를 사서 토스트를 팔기 시작했다.

경험은 없었다. 노점상은 그 자체 불법이었다. 경쟁업체라고 할 수 있는 주변 상인들과 거리의 깡패들도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당시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주문받고 계산하고 토스트를 구워서 건네는 모든 과정이 모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해야 하는 일인데도 내겐 너무 어려웠다. 그만큼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노점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연간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주식회사 석봉토스트를 세워 대표이사가 됐고 지금까지 전국에 가맹점 300여개를 냈다. 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에도 입점했다. 기업체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중소기업청 지정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를 지냈다. 

아내와 함께 지금의 내가 있도록 만든 분은 소천하신 반석성결교회 김용련 원로목사다. 김 원로목사는 나의 영적인 멘토셨다. 아내와 김 원로목사를 만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김석봉을 만드신 이는 물론 하나님이시다. 나는 사업가가 안 됐다면 목회자가 됐을 것이다. 

사업으로 승승장구할 때 나는 이제 사업을 접고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이제 사업을 그만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은근히 기대하며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목회가 아닌 사업을 하라는 확신을 주셨다. 이후 나는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전북 정읍 내장산 기슭에서 8남매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1950∼60년대에는 어렵지 않은 가정이 드물었지만 우리 집은 더 어려웠다. 방 한 칸짜리 초가집에 열 식구가 살았다. 농지는 없었다. 산을 개간해 고구마를 심었고 겨우내 고구마만 먹었다. 고구마도 떨어지면 정부에서 지원받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밀가루를 담았던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신발도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표현해 ‘절망’ 그 자체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58년생. 전북 정읍 내장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거쳐 91년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 졸업. 97년 노점 ‘석봉토스트’ 창업, 2005년 국제코스타 강사, 2009년 ㈔한국강사협회 대한민국 명강사 95호, 2011년 중소기업청장 YES리더 기업가 특강 강사 역임. 현 ㈜석봉토스트 대표, 극동방송 운영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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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혼 카존 유튜브 강습 동영상

1) blues shuffle R&B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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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펑키, 합합, 알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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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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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댄스/팝/룸바 그루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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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3 + 4 +










3) ghost notes-lesso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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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a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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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의 6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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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훈 목사의 기독교 미술사] 5) 로마네스크 미술에서의 교회건축

[임재훈 목사의 기독교 미술사] 5) 로마네스크 미술에서의 교회건축

입력 2014-12-23 11:27 수정 2014-12-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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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훈 목사의 기독교 미술사] 5) 로마네스크 미술에서의 교회건축 기사의 사진
1. 로마네스크미술(Romanesque Art)은 고딕미술(Gothic Art)과 함께 서구 기독교미술의 백미로서 중세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표현한 미술양식이다. 

로마네스크(Romanesque)라는 말은 ‘로마와 같은’이라는 뜻으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서구 교회건축의 외관이 두꺼운 벽과 반원아치, 기둥의 사용 등 고대 로마의 석조건축을 닮았음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이 붙인 용어이다. 

바사리(G. Vasari)에 의해 고딕으로 통칭되었던 중세미술이 로마네스크 개념의 대두로 세분화된 것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건축은 물론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이 시기 미술에 대한 총체적인 양식개념을 뜻한다. 

로마네스크양식은 당대 지중해유역의 비잔틴양식, 이슬람양식에 문화적으로 열세이던 서유럽이 알프스 이북 대서양유역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스스로 발전시킨 최초의 단일양식이다. 

이 양식의 출현은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른 봉건주의의 정착, 클뤼니(Cluny) 수도원에서 비롯한 수도원 개혁운동 그리고 밀레니엄 전후 종말론적 신앙열기에서 기인한 성지순례 등을 배경으로 한다. 

2. 주후 1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유럽전역에서 반원아치, 장십자가형(Latin Cross) 평면구조, 종탑, 광탑 등 형식상의 공통점을 지닌 교회건축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대규모 미술현상은 성지순례(Pilgrimage)를 통한 광범위한 문화교류와 접촉, 회교도들에 대항한 재정복(Reconquista)과 십자군원정(Crusade, 1096-1279년)에 따른 기독교세계 결집의 결과이다.

특히 서로마제국 멸망(476년)이후 카롤링거왕조기를 제외한 오랜 혼란기에 고대 고전(Greco-Roman) 학문·문학·예술의 유일한 전수와 거점으로서 수도원이 기여한 로마네스크 미술 생산주체로서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초기 기독교회의 평평한 목조천장을 아치를 이용한 둥근 천장 즉 궁륭형(vault)의 석조로 개조한 점이다. 

이러한 석재궁륭은 교회내부를 크고 높게 보이게 하였으며 화재에도 잘 견딤으로 영원히 존재해야하는 신의 전당의 구현에 적합하였다. 

초기에는 터널식 원통형 궁륭(tunnel vault)이 적용되었으나 많은 양의 석재가 필요했고 채광도 잘 안되었기 때문에 원통형 궁륭을 직각으로 교차시키는 교차 궁륭(groin vault)으로 발전했다. 그럼으로써 무거운 천장의 무게가 경감함으로 늘어난 문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내부의 은은한 빛(고딕의 현란한 빛과는 다른)이 견고하고 고요하며 평온한 느낌의 로마네스크교회 특유의 분위기를 이루었다. 

                      (사진1) 로마네스크 건축양식- 아치와 궁륭(원통형 궁륭, 교차형 궁륭)

3. 스페인 북부에서서부터 프랑스, 라인강 계곡의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와 영국 등 서유럽 전역에 나타난 로마네스크양식은 기독교신앙을 구심점으로 양식상의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또한 기능과 풍토, 소재의 차이로 인해 지역별로 여러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활동이 가장 활발히 일어났던 곳은 독일이었다. 

독일로마네스크는 10세기 중반 로마네스크양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오토왕조 시대의 전(前)로마네스크양식(Vorromanik/Pre-Romansque, 오토양식)을 바탕으로 11세기 후반 살리어왕조, 쉬타우퍼왕조 시대에 개화하였다. 

쉬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은 초기 궁륭 천장을 지닌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이후 서유럽 교회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이 성당은 중정이 없이 바로 길에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3랑식 구조에 두 개의 돔과 네 개의 종탑을 지니고 있다. 

신랑과 익랑의 교차부에는 동방을 뜻하는 팔각형 돔이 설치되어 있으며 제단 아래 납골당에는 살리어왕조(Salier)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교회 입구에 있던 중정(atrium)을 없애고 대신 탑을 세우는 방식은 고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구분하는 확연한 기준점이다.

                 (사진2) 쉬파이어 대성당(Kaiserdom zu Speyer), 1024-1106년, 독일 쉬파이어

                         (사진3) 쉬파이어 대성당 내부, 초기 궁륭(vault) 형태가 나타난다. 

            (사진4) 쉬파이어 대성당, 신랑과 익랑 교차부의 팔각형 돔, 동쪽에서 바라본 외관

보름스 대성당(Wormser Dom)은 동·서 양단에 내진(choir)이 있어 양 측면 중앙부에 출입구가 있는데 이러한 이중내진(Doppelchor)은 독일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이다. 

동·서 양쪽의 내진은 각각 동쪽은 영적인 세계와 교회의 권위를 서쪽은 세속의 세계와 국가의 권위를 상징함으로 두 권력의 통합을 추구한 신성로마제국의 이상을 나타내었다. 

서임권 분쟁(Investiturstreit, 1076년부터) 이후 이중내진은 교황권과 황제권, 교회권과 세속권의 긴장관계를 반영한다. 

내부 천장은 교차궁륭을 사용하며 늑재(ribbed vault)를 사용하는 점에서 고딕양식의 도래를 예고한다. 
                   (사진5) 보름스 대성당(Kaiserdom zu Worms), 1110-1181년, 독일 보름스

                        (사진6) 보름스 대성당 내부, 교차궁륭과 늑재 사용, 독일 보름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교권에 대항하여 정치적인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봉헌한 쉬파이어대성당, 보름스대성당, 마인츠대성당을 가리켜 ‘라인강변의 3대 황제 대성당’(3 Kaiserdome)이라고 부른다. 

초기로마네스크시대에 쾰른 등지에서 출현한 베스트베르크(Westwerk) 교회는 두 개의 탑으로 교회의 서쪽 정면을 강조한 양식으로 서구 교회건축에 동반하는 첨탑의 시초를 이룬다. 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상크트 판탈레온 교회(Sankt Pantaleon) 이다. 

       (사진7) 상크트 판탈레온 교회(Sankt Pantaleon), 980년, 베스트베르크(Westwerk), 독일 쾰른

프랑스에서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길목에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식 교회’(Pilgrimage Church)라는 독특한 형식이 나타났다. 

당시 성지 순례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와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그리고 예루살렘 등 3대 성지를 향해 고해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성지순례는 성지에 보관된 성유물 경배 시 이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성유물 숭배에 따른 것이다. 

투르의 생 마르탱교회에서 시작된 순례교회는 동쪽 제단을 둘러싼 회랑이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툴루즈의 ‘생 세르냉 대성당’(Saint Sernin)은 순례식 교회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툴루즈는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주요 순례길에 위치해 있다. 

장십자가(Latin Cross) 평면구조 교회의 세로축 신랑과 가로축 익랑(트랜셉트)이 만나는 교차부,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부분에 팔각형의 광탑이 세워져 명상적인 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동쪽 제단 주위로 회랑을 두르고 여기에 작은 예배당들을 방사형(radiating)으로 덧붙였다.

     (사진8) 생 세르냉 대성당(Basilique Saint-Sernin de Toulouse), 1070-1120년, 프랑 스 툴루즈


          (사진9) 생 세르냉 대성당, 앱스(제단) 주변의 방사형 채플과 팔각형의 광탑, 툴루즈 

프랑스 
                                        (사진10) 생 세르냉 대성당 평면도

영국의 로마네스크양식은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들여왔기 때문에 노르만(Norman) 양식이라고 불려진다. 친교황적인 노르만양식은 캔터베리의 앵글로-색슨 전통을 대체함으로 노르만족이 지닌 정치적인 힘을 상징하였다. 

더램 대성당(Durham Cathedral)은 영국 노르만양식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더욱 장식적이며 웅장한 느낌이 든다. 

같은 시기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 영지와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칠리아를 정복한(1059년) 노르만인들 역시 친교황 정책을 고수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비잔틴양식을 수용한 관용적?절충주의적 입장을 지닌다. 

                     (사진11) 더램 대성당(Durham Cathedral), 1093-1133년, 영국 더램

                        (사진12) 더램 대성당(Durham Cathedral) 내부, 영국 더램

이탈리아 성당들은 십자 교차부에 돔을 얹은 본당과 종탑, 세례당이 별개로 구분되는 것이 특징이다. 

피사대성당(Duomo di Pisa)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마네스크 건축이다. 

십자형 평면 교차점에 돔을 얹었으며 내부 천장은 바실리카 전통을 따른다. 두오모 파사드(서쪽 정면부)는 아치장식으로 덮여 있는데 열주를 많이 사용함으로 고대의 전통을 재현한다. 다색의 대리석 패널로 쌓인 표면장식은 토스카나 지역 특유의 양식을 이룬다. 돔에 나타나는 작은 장식의 연속은 비잔틴의 특성을 수용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라고 알려진 종탑은 본당 동쪽 제단부 옆에 분리되어 서있다. 

서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군원정의 중간 기착지였던 피사는 고대 로마의 전통을 기반으로 주교역지였던 비잔틴의 양식 그리고 당대의 북방 로마네스크 양식을 수용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이루었다. 

                    (사진13)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 1053-1272년, 이탈리아 피사 

                          (사진14) 피사 대성당 내부천장, 바실리카전통을 따르고 있다. 

   (사진15) 피사 대성당 파사드(서쪽 정면부), 아치와 열주를 사용해 고대의 전통을 재현하고 있다. 

4. 로마네스크교회의 전체적인 인상은 두터운 벽과 탑으로 인해 견고한 성채를 연상하게 한다. 마치도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 지상에서 암흑의 세력과 영적 싸움을 전개하는 ‘전투적인 교회’의 모습을 대하는 듯하다. 

당시의 교회가 19세기 낭만주의 문필가들의 표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천년과 수난 천년(주후 1000년-1033년)의 시기에 임할 재앙과 종말에 대한 이른바 ‘천년의 공포’에 집착하였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영적인 자각과 경건에 몰두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그들의 신앙과 자의식을 교회건축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음호에 로마네스크미술의 조각과 회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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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보육원생 137명의 아주 특별한 성탄 쇼핑


평범한 가정의 일상이 소원인 아이들이 있다. 대형마트에 가서 쇼핑 카트를 끌며 과자와 옷, 장난감을 사고 식료품 코너에서 시식을 하는 일이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평생소원 중 하나다. 

전북 군산 남군산교회(이종기 목사)는 지난 19일 오후 6시 삼성애육원 군산일맥원 등의 보육원생 137명을 이마트 군산점으로 초청했다. 아이들에게는 1인당 5만원짜리 상품권을 한 장씩 지급했다. 

중·고생 아이들은 2∼3명씩 짝을 이뤄 카트를 끌었다. “어느 코너부터 갈까”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카트의 손잡이를 쥔 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말을 꺼낸 아이도 부리나케 뒤따랐다.

초등학생들은 보육원 선생님들이 데리고 다녔다. 하성우(9·가명)군은 껌 한 통과 바나나 우유 한 묶음을 카트에 집어넣더니 선생님에게 “이제 얼마 남았어요?”라고 물었다. 옆에 있던 아이는 선뜻 물건을 고르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들과 동행한 남군산교회 성도 박종석(55)씨는 “성탄절을 앞두고 마트에 간다고 공지하면 한 달 전부터 사고 싶은 것을 썼다 지웠다 한다”면서 “그 목록을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북적였던 곳은 옷 코너였다. 2만∼3만원으로 살 수 있는 후드 티, 라운드 티 등이 인기였다. 여중생들은 스킨, 로션, 폼 클렌저 등 화장품을 많이 샀다. 카트를 끌고 속옷과 책 코너를 왔다 갔다 하던 서형석(13·가명)군은 “후드 티 2만9900원, 양말 9900원어치를 샀는데 나머지 돈으로 내의를 살까, 책을 살까 고민 중”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쇼핑카트에 탄 태연(6·가명)이는 더 신났다. 보육원 김형숙(40·여) 선생님이 따뜻한 티셔츠를 보여주며 “태연아, 이거 어때”라고 묻자 “예뻐요, 빨리 그거 사고, 장난감 판매대로 가요. 야호!”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환호성이 이마트 안에 길게 여운을 남겼다. 

남군산교회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소중한 일상을 선물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교회에서 음식을 대접받은 한 보육원생이 “부모 있는 아이들처럼 대형마트에서 쇼핑카트를 밀며 쇼핑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감사편지를 적어 보냈던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밑에서 자란 이종기 목사는 이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었기에 가슴이 아팠다. 

남군산교회 사회봉사연구 사역위원회는 그해부터 마트 쇼핑이라는 성탄선물을 마련했다. 남군산교회에선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위원회가 기획과 진행, 마무리, 평가까지 모든 사역을 주관한다. 예배연구 사역위원회 등 위원회만 25개다.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사역은 사회봉사연구 사역위원회가 맡고 있다.

남군산교회는 지역 내 모든 보육원 아이들을 초청해 외식을 하는 행사도 갖는다. 2004년부터 5월 가정의 달과 11월 추수감사절 등 해마다 두 차례 아이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 목사는 “행사를 거듭하면서 아이들도 자신감을 많이 회복해 어디 가서나 당당하게 행동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처음 외식을 할 때는 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었지만 지금은 ‘고기 더 주세요, 밑반찬 더 주세요’ 등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처음 뷔페에 갔을 땐 우르르 몰려다니며 허겁지겁 먹었지만 이제는 제법 여유로워졌다.

남군산교회는 1988년부터 보육원 아이들을 돌봐왔다. 처음에는 5명의 원생들에게 매달 용돈을 주고 1년에 두 차례 외식을 시켜주며 옷을 사줬다. 1995년부터는 한 곳의 보육원을 정해 1년에 한 번씩 모든 아이에게 옷을 사줬다. 2004년부턴 지역의 모든 보육원으로 지원을 확대했다.

여기에는 평신도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인 교회는 교단 내에서 1인당 연간 헌금 총액(280여만원)이 가장 많은 교회로 꼽힐 정도로 평신도들의 헌신도가 높다. 1983년 30명으로 개척한 교회는 현재 장년 성도 820여명 규모로 성장했다.

군산=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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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타 의미 - 잘 정리된 것이 있어 이곳에 메모

오페라 : 노래, 연기, 의상, 무대 장치, 관현악을 포함하는 종합 예술
오라토리오 : 작은 규모의 오페라로, 성경 내용을 노래함
칸타타 : 작은 규모의 오라토리오로, 독창과 합창으로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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