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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2) 가난한 열네살 소년 “아이스케키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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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5. 1. 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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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3개월 가까이 울었다. 결국 일을 배우기로 했다. ‘기술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려다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기술자 밑에서 ‘시다바리(조수)’를 하다 얻어맞기만 했다. 초등학교만 나온 14세 청소년이 겪는 사회생활은 밑바닥 순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을 따라 경기도 성남으로 갔다. 형님이 일하러 가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2주 동안 연습한 것 같다. “아이스케키, 5원에 얼음과자 2개.” 돈도 벌어 좋았지만 아이스케키 가게에서 주는 비빔국수가 아주 좋았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비 오는 날은 장사하기 가장 나쁜 날이었다. 아이스케키가 팔리기도 전에 녹아서 흘러내렸다. 우리는 안 녹은 것처럼 보이려고 빨아 먹어 가며 아이스케키를 사라고 외쳤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술을 배워야지 밥 먹고 산다”며 나를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 넣었다.

요즘은 자동차정비 학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기술자 밑에서 배웠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혹독하게 다뤘다. 정비공장에는 내 또래가 다섯 명 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공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잘못 가져오면 그 공구를 사람에게 던졌다. 바닥에 던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던졌다. 사람을 맞췄다.

저녁에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면 온몸이 파랬다. 다들 똑같았다. 멍이 든 몸을 서로 보며 서러워 울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군말 없이 일했다. 월급은 없었다. 그저 비누 값 정도만 받았다. 우리가 아니어도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 일과를 끝내고 청소를 할 때였다. 카바이드(탄화칼슘 덩어리)로 용접을 한 이후에는 카바이드 용접기 통을 비우고 깨끗이 닦아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 통을 청소하다가 그날 배수구가 막혔다. 카바이드 찌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이 역류해 바닥이 엉망이 됐다. 이를 알게 된 공장장은 “니들 다 죽었어”라고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변에 있는 공구들을 던졌다. 쇠뭉치가 달린 고무호스도 휘둘렀다. 또래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나만 얼떨결에 남았다. 그리고 그 호스에 등을 맞았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죽은 것처럼 바닥에 뻗었다. 공장장은 그런 나를 발로 밟았다. 나는 살겠다고 몸을 움직여 자동차 밑으로 피했다. 이어 화장실로 숨었다. 그날 도대체 어떻게 집에 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1시간 이내의 거리를 거의 서너 시간 걸려 기어갔던 것 같다. 이를 안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경찰서에 가서 공장장을 고소했다. 공장장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공장장은 이튿날 멀쩡하게 출근했다. 알고 봤더니 공장장의 형님이 경찰서장이었다. 결국 내가 정비공장을 그만뒀다.

소득은 있었다. 1년 반 정도 있으면서 산소용접 기술을 배웠다. 나는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가서 세차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혹사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임은 내가 교회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교회에 갔다 오면 긴 용접봉으로 나를 많이 때렸다. 그나마 사장님은 나를 잘 봤다. 어린애가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 것 같다. 나 먹으라고 생선을 사서 끓여주곤 했다. 그러나 그 세차장도 선임기술자 때문에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때 다닌 교회가 인천 숭의감리교회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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