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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석봉 (7) ‘토스트 스낵카’ 노점상 사업… 출발과 함께 시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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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선티비 2015. 1. 26.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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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남편이 시간 관리를 잘하게 해주세요”였다. 반석성결교회의 금요기도회 때마다 이 기도제목을 내놨다. 나도 나름 전도사였는데, 이런 기도제목을 공개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계획 없이 살았다. 아내의 결혼 조건대로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그뿐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

둘째를 낳기 전 아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 아내는 어린이집 교사로 갔다. 그즈음 나는 고졸 검정고시를 마쳤다. 이어 경기도 안양 성결신학대에 들어갔다. 셋째를 낳았다. 학비와 셋째 양육비 등 돈 쓸데가 많아지자 아내는 학교 근처로 이사해 놀이방을 하겠다고 했다. 상가를 임대했고, 반쪽은 살림집, 반쪽은 놀이방으로 꾸몄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

신학대를 마치자 아내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200만원이 든 통장을 내밀면서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어요. 다 마쳤으니까 이제 돈을 벌어 우리를 먹여 살리세요. 나는 오늘부터 일을 안 합니다. 곧 쌀도 떨어지고요.” 아내는 놀이방 아이들을 다 돌려보냈다.

200만원으로 시작할 만한 일은 없었다. 웬만한 가게 보증금도 3000만원 이상이었다. 이때 이길우 전도사(현재 반석성결교회 목사)가 “홍대 앞에 토스트 파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더라”고 했다. 홍대 근처 노점상에 가서 토스트를 사 먹으며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동안 사장과 이야기도 하고 멀리서 동향도 살폈다. 토스트를 사다가 내용물이 무엇인지 일일이 핀셋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다른 음식을 파는 노점상도 둘러봤다. 그러면서 마음을 굳혔다. 조그만 차를 마련해서 토스트를 팔자. 새 차는 당연히 비쌌다. 800만원은 줘야 했다. 그러던 중 230만원짜리 폐차 직전의 스낵카를 판다는 신문 광고를 봤다. 차를 사 놓고 2개월간 토스트 만드는 연습을 했다.

노점상은 쉽지 않았다. 자리를 찾는 것부터 문제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야 했고, 지나가면서 사 먹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어떤 곳은 사람은 많은데 그냥 바쁘게 지나갔다. 시청역을 시작으로 웬만한 지하철역 인근은 다 가 봤다. 그러다 녹번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좁은 장소지만 차를 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안됐다. 역 안에 사람은 넘치는데 토스트를 사 먹는 이들은 없었다. 첫날 5000여원을 벌었다. 일주일을 버텼다.

이번에는 홍대입구역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에 3만여원을 벌었다. 재료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다들 출근길에 지하철 타러 가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초를 다투는 출근 시간에는 나도 안 사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하철로 들어가는 곳보다 나오는 곳, 출근이 아닌 퇴근하는 이들이 많은 곳,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곳을 물색했다. 

서울시청 건너편 더 플라자 호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대박이었다. 불티가 났다. 첫날 30분도 안 돼 준비한 재료가 다 팔렸다. 다음날은 재료를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도 2시간도 안 돼 다 팔렸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닥쳤다. “당신 뭐 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어디서 온 거야.” 주변 상인들이었다. 바로 옆 가판대 아주머니는 긴 철사를 들고 와 위협했다. 빨리 치우라고 아우성이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과 파출소에 갔다. 경찰은 “얼굴을 보니까, 선하게 생겼는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처음이니까 오늘은 봐 드려요”라며 가라고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됐다. 호떡 장사 아저씨는 오전 11시에나 문을 열면서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토스트를 파는 내게 와 당신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방해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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