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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CBMC "올 8월 제주에서 '제43차 한국대회' 성공 개최할 것"


한국기독실업인회(한국CBMC·중앙회장 두상달)는 31일 오전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제43차 한국대회’ 개최를 위한 발대식을 열었다(사진,한국CBMC 제공). 한국대회는 해마다 3000여 명의 전세계 ‘한인CBMC 디아스포라’가 모이는 한국CBMC의 가장 큰 행사다. 회원들은 워크숍이나 특강을 통해 CBMC 비전을 새롭게 하고 영적으로 재충전한다. 올해는 8월 17일부터 2박 3일 동안 제주에서 ‘견고한 기초 위에 미래와 희망으로(사 54:29)(렘 29:11)’라는 주제로 열린다.  


이번 한국대회 기획을 맡은 세라박 총괄기획팀장은 “제43차 한국대회를 앞두고 기독실업인들의 큰 축제를 알리기 위해 이번 발대식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정호철 남부연합회 회장의 개최 선언으로 시작한 이날 발대식에는 두상달 한국CBMC 중앙회장, 세라박 총괄기획팀장, 조학봉 제주연합회 회장 등 한국CBMC 임원 및 연합회 회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예배에서 강용규(한신교회) 목사는 ‘부활의 현재성’이라는 제목으로 “오늘도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믿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부활의 역사는 계속된다”며 “제43차 한국대회에 부활의 기적이 임하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참석자들은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내가 먼저 섬기는 한국대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국대회! 하나님을 높이는 한국대회!”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CBMC 제43차 한국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했다.


두상달 한국CBMC 중앙회장은 격려사를 통해 “우리의 기대에 차고 넘치는 한국대회가 될 것”이라며 “생명 잔치와 말씀의 축제인 한국대회에 참여해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업그레이드 된 한국CBMC가 되자”고 강조했다. 


제43차 한국대회는 한국 CBMC 남부연합회와 제주연합회가 함께 기획, 준비한다. 올해로 창립 64주년을 맞는 한국CBMC는 전국에 271개 지회와 33개 연합회를 두고 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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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이런 사람을 만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 기사/ [크리스천 CEO―(30) 순창 전통 별미고추장 설동순 대표] “성공 비결요?… ”

이 기사는 기존의 틀에 메이지 않고 그 인터뷰이와 나눈 이야기 위주로 기술하고있다.

보통 주요지가 순창의 재래비법으로 30여년간 고추장 판 설동순 권사가 있다고 한다면, 

대개는 처음 고추장을 팔기 시작한 과거로 가기 쉬운데, 여기에서는 후원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인터뷰이를 만났을때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기사를 무엇을 써야할지 고민했던 것 같다.

이럴때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가 승승장구할수 있는 비결'이라고 중간에 쓴 것처럼, 취재한 것을 써 내려갈 연결고리를 만들고 이에 대해 쓰면 되는 것이다.


 

입심좋은 아주머니. 여느 시장이나 밥집, 멀리 갈 것도 없이 시골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아주머니였다. 첫눈에 다르다고 느낀 것은 피부가 너무 곱다는 것이었다. ‘순창전통 별미고추장’ 설동순(순창읍교회 권사·56) 대표는 “고추장 먹고 사는 덕분”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껏 화장품은 고사하고 세수할 때 비누 한번 쓴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베푸는 삶을 살면 얼굴조차 고와지는 모양이었다.


업체는 전북 순창읍 백산리의 전통고추장민속마을에 있다. 1991년 7월 창업해 그 다음해에 전북도지사로부터 ‘내고장 일품’으로 지정받았고, 이후 한국전통식품 품질인증, 전북 최고명품 인증도 받았다. 또 한국-중국간 발효식품국제박람회 대상을 비롯해 각종 국제식품 전시회에 참가해 나름대로 명성을 쌓았다. 설 대표는 순창의 재래비법을 전수받고 30여년간 고추장을 직접 만들어 판 ‘고추장 제조기능인’이기도 하다. 또 타지역의 농업기술원에서 특강도 하고, 최근에는 저서도 냈다. 16년 동안 승승장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비결. “섬겨요. 하나님을 섬기고, 목사님을 섬겨요. 그러면 오케이예요.”


설 대표는 재정적인 후원자를 자청하고 살았다.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대상이다. 후원자라기보다는 본인의 말대로 “섬긴다”는 말이 맞았다. 길을 가다가 먹고 싶은 과일을 보면 섬기는 교회의 목회자에게 먼저 사 보내고 난 이후에 자신이 먹을 과일을 사는 분이라고 주변에서 말한다. 한번은 담임 목사에게 승용차를 사드린 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날 뻔한 적도 있다.


“남편이 갑자기 들어오더니 ‘목사님 차 사줬다며?’라며 눈에 힘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소개만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가 차를 사준 걸로 아나 본데, 그냥 그렇다고 하고 우리가 축복 받아 버려요’라고 받아 넘겼지요. 그런데 그게 중고차라 너무 죄송해요.”


출석 교회 목사님 외에도 그가 후원하는 목회자는 많다. ‘고추장을 아무리 많이 팔아봐야…’싶었지만 매달 10여명을 고정후원하고, 전체적으로 50여명에게 선교헌금을 낸다고 한다. 물론 고추장과 쌀을 보내주는 것은 별도다.


건축비가 부족해 짓다 만 시골교회, 전라도 남원의 낙원교회(2007년 9월22일자 본보 소개)에 고추장을 대 준 이도 설 대표다.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광주의 한 교회에 컴퓨터를 사주었는데 ‘우리가 컴퓨터가 필요한 줄 어떻게 알았냐’며 여러 차례 감사인사를 받았다고 했다. 목사님이 고추장을 사러 오면 거의 원가에 팔 때가 많다. 게다가 된장, 청국장도 퍼주고, 모듬장아찌도 얹어드린다.


“덤으로 이것저것 막 드리니까 목사님들이 놀라시죠. 그러면 저희 제품 드실 때마다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요. 매장을 나가시기 전에 기도도 해주시죠. 그러니 제 사업이 잘 안 되고 배기겠어요?”


그는 돈이 생기면 필요한 곳에 무조건 쓴다. 헌금하고, 후원하고, 생활비로 쓴다. 그리고 또 필요한 곳이 생기면 하나님이 다 채워준다고 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많이 축복해주세요. 손님 배웅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요. 올 추석 땐 택배비만 하루 60여만원이었어요. 무엇보다 섬길 때의 그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해요.”


설 대표의 후원자 삶은 요즘 글로벌화됐다. 몇년 전부터 해외선교에도 후원한다. 인도와 러시아에 세워지는 교회에 거액의 건축헌금을 냈다. 본전 생각 안 나냐고 하자 “본전 생각이 뭐여. 내 돈이 내 돈이 아녀, 하나님 돈이여. 하나님 돈으로 후원하며 생색내는 격이지”라며 웃었다.


그는 인도에 어린이집을 세우는 데는 그렇게 큰 돈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기자님도 후원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그곳에 이미 1000만원을 보냈다.


글·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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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10> 칙칙한 맹학교에 밀알관 신축 이어 환경개선


이전 한빛맹학교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칙칙했다. 4층 건물 위에 가건물이 있었는데 원래 건물도, 가건물도 디자인이라고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눈이 잘 보이는 직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학생들이 시각장애로 볼 수 없다고 해서 학교의 외형과 분위기가 아무래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교장인 나는 전국 최고의 특수학교를 목표로 건물을 고치기로 했다. 허가도 허가지만 건축비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 지원이 절실했다. 나는 교육청과 교육부를 찾아가 도와 달라며 호소했지만 모두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2004년 특수학교 환경개선사업 차원으로 한빛맹학교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신축 건물은 건평 4958㎡(약 1500평) 규모로 50여억원이 투입됐다. 이곳에 연주도 할 수 있는 음악 전문 교육공간을 마련했다. 한빛맹학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이 건물을 ‘밀알관’이라 불렀다. 


증개축도 추진했다. 연이어 큰 공사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허가부터 모든 게 순탄하게 풀렸다. 총 공사비 150억원이 들어간 두 건물은 현재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라서 건축을 대충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설계 단계부터 꼼꼼하게 챙겼다. 설계도면의 선 위에 끈을 올려놔 달라고 해서 이를 손으로 만져 설계도면을 머릿속에 넣었다. 공사 때는 현장에 가서 손으로 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계도면과 비교했다. 설명을 듣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 이해될 때까지 질문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내 안에 집요하다 싶을 정도의 집념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2008년 8월 중증장애인 생활시설을 건립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이 시설은 시각장애인 외에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도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장소가 필요했고 후보지를 고르기 위해 2년간 500여곳을 찾아다녔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의 양지바른 큰 길 가에 세웠다. 바로 ‘효정비전타운’이다.


건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3년간 이런저런 건물을 건축한 것은 주변의 많은 분들이 함께 수고해줬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있었다. 이들 건물은 나와 시각장애인들을 격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였다. 


한빛맹학교 학교기업인 ‘한빛힐링센터’ 이야기도 하고 싶다. 전국시각장애학교장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시각장애인의 안마업 독점이 위헌 시비에 걸렸다. 만약 위헌으로 결정되면 시각장애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마 직업교육을 시키는 맹학교에도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했다.


맹학교 교장들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대책의 하나로 맹학교에 학교기업을 만들기로 했다. 재학생에게 직업교육을 하고 졸업생들에게 일자리도 줄 수 있는 대책이었다. 이 일을 회장인 내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육부가 추진하는 장애학생 진로·직업교육의 일환으로 특수학교 학교기업이 생겼다. 한빛힐링센터는 이때 특수학교 학교기업 1기로 선정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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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9> 부모의 결혼 반대에 가족 몰래 짐 챙겨나온 아내


아내 유경화는 점자도서를 만드는 점역사였다. 1987년 서울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회 점자도서관에 갔다가 아내를 알게 됐다. 아내는 처음 만난 내게 기꺼이 팔을 내줬다. 보통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는 팔을 잡게 한다. 아내의 살결은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아내는 천사표 아가씨였다. 대학시절 때 ‘책을 읽어 달라’ ‘책을 녹음하는 데 도와 달라’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고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내와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시각장애인이고 가난했다. 동생도 시각장애인이었다. 결혼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6개월간 연락을 끊기도 했다. 


나는 시각장애인대학생연합회 모임에 갔을 때 아내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는 맹인이고 가난하고 내 동생도 맹인이에요.” 아내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그해 겨울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했다.  


아내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당연했다. 그래도 아내를 놓칠 수 없었다. 주변에선 그냥 둘이 먼저 결혼하라고 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92년 2월 8일 오후 5시 서울 한빛교회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장인어른에게 들통이 났다. 아내는 가족 몰래 짐을 챙겨 나왔는데 이를 장인어른이 보셨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장인어른이 한빛맹학교에 전화를 해 알게 됐다. 장인어른이 아내를 붙잡아 집에 가뒀지만 아내는 도망쳤고 나를 찾아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교회 대신 주례를 하기로 한 목사님 댁에서 혼인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버렸다. 


우리는 집에 가야 했지만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13일간 전국을 떠돌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처가를 찾았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두 분은 모든 걸 포기하고 나를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세 명의 자녀를 선물로 주셨다. 첫아이는 딸이었다. ‘예수님의 이웃’이라는 의미로 ‘예린’이라고 이름 지었다. 둘째 동성이는 서울대 대학원 입학시험 즈음에 낳았다. 서울대 대학원은 카이스트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동생 용수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나를 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입학시험 3일을 앞두고 병원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제 쉬러 병원에 갑니다”라고 했을까.


셋째는 내가 박사를 수료하고 8년 뒤 낳았다. ‘어진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혜린’이라고 불렀다. 현재 큰아이는 이화여대 4학년, 둘째는 한동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막내 혜린이는 서울 불암중 1학년이다. 다들 기특하고 대견하다. 모두 아내 덕분이다. 이 기회를 빌려 아내에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사랑하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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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8> 시각장애인으로 카이스트 박사학위 받은 동생


10여년 전 동생 용수(47)가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졌다.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우리 형제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나”라며 서럽게 울었다. 동생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적이 있다.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당황했다. 그 순간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일이 동생에게도 일어났다는 게 가슴 아팠다.


동생은 열일곱 살에 실명했다. 나는 차마 동생에게 내가 다니는 한빛맹학교에 오라고 할 수 없었다. 맹학교에 두 형제가 같이 있다는 게 나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했다. 동생은 맹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냥 검정고시를 치렀다. 평소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던 나와 달리 동생은 내성적이었다.  


동생은 순수과학에 관심이 많아 서울시립대 수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대학 측 행정직원들은 시각장애인을 받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아버지는 청와대에까지 민원을 넣어 동생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대학 내에서도 공부를 한번 시켜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동생은 실력대로 시험에 합격해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장애가 없어도 수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사실 불가능한 학문이다. 특수교육 대상자 특별전형이 보편화된 지금도 시각장애인들이 진학하는 학과는 거의 정해져 있다. 동생처럼 순수과학을 공부하는 시각장애인은 없다. 외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동생은 시시때때로 주목을 받았다. 대학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 학위를 차례로 취득하자 큰 화제가 됐다. 지상파 방송 세 곳이 동생을 저녁 주요 뉴스 시간에 소개했다. 심지어 대통령도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


동생이 쓴 논문은 ‘F2 상위에서의 팽창치환 연구’라는, 제목부터 난해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암호체계에 관한 것으로 이를 연구하는 데는 공간감각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에게 공간감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동생의 논문은 더 대단한 것이었다. 


동생은 지금 수학을 넘어 천체물리, 우주, 철학까지 폭넓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가진 지식과 재능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동생은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번은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우주와 자연에 관해 연구해보니 결론은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어.” 동생은 자연, 우주, 수학, 노장사상 등에 빠져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 동생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나는 소망한다. 동생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함께 예배드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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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교회 이정익 목사 후임으로 박노훈 목사 내정


서울 신촌교회 이정익 목사 후임으로 박노훈(사진) 연세대 교수가 내정됐다. 신촌교회는 최근 당회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21일 밝혔다. 박 교수는 4월 3일 교회 임시 사무총회의 찬반 투표와 지방회 승인 절차를 남겨두고 있다.

 

박 교수는 연세대 신학과와 서울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 신학석사, 밴더빌트대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내쉬빌연합교회에서 목회했으며 현재 서울 중앙교회 협동목사, 연세대 부교수, 교목을 맡고 있다.

 

박 교수는 올해 46세로 ‘다소 젊지 않느냐’는 지적도 받고 있지만 신촌교회 성도 60%가 40대 이하이고 이 목사도 46세에 부임했다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것이 교회 측 입장이다. 신촌교회 담임 목사 이·취임식은 5월 29일 열린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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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7> 맹학교 후배 빨리 가르치고 싶어 대학 조기졸업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교사가 되려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인간관계를 깨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했다고나 할까.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조기 졸업을 했다. 성적이 우수해 7학기 만에 학부를 마친 것이다. 내 안에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맹학교에 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졸업했으니 이제 현장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있었다. 


1992년 모교인 한빛맹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지지해주셨던 한신경 교장 선생님이 90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학교에는 이전에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생님들만 계셨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암 투병 중에도 나와 동생 용수를 불러 장학금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곤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양수야, 네가 똑똑하니 한빛맹학교의 교장을 잘 맡아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비하면 한빛맹학교는 보잘것없었다. 지금 한빛맹학교는 학생 수가 140여명이지만 당시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맹학교는 한빛맹학교를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빛맹학교 학생들이 서울맹학교로 가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셨던 한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언젠가 교장을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빛맹학교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맹학교 제자이자 후배들과 수시로 대화하며 미래지향적인 학교발전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내가 교장이 되면서 모토로 삼았던 ‘하나님 중심의 경영, 학생 중심의 경영, 청렴한 경영’이라는 학교 목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03년 한빛맹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됐다. 내 나이 서른일곱, 젊은 나이였다. 교장이 되고 나니 낙후된 학교 시설, 정체된 학교 분위기, 학생들의 이탈 상황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즈음 아세아연합신학교 교수로 계셨던 학부모 한 분이 교장실에 찾아왔다. 장학금 50만원을 기부하면서 한빛맹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의 격려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함께해주시며 도와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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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6>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1985년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이 생겼다. 나는 1기 입학생이 됐다. 학교는 처음에 여러모로 미흡했다. 대부분 선생님이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한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나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점자를 늦게 배운 탓에 읽는 속도가 더뎠다.


하루는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까지 지낸 고 강영우 박사가 한빛맹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저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강 박사님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셨으니까 나는 한 단계 높여서 서울대학교에 가자’고 결심한 것이다. 


고민이 생겼다. 고등학교 과정이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한빛맹학교에서는 서울대 진학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대학 진학을 위해 낮에는 맹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하지만 한빛맹학교 선생님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맹학교에서 배우면 되지 왜 학원에 가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생각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학원에 가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5공화국 시절로 재학생은 과외가 금지돼 있었다. 맹학교 친구들의 반응도 싸늘했다. 시기하고 비아냥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빛맹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전적으로 내 편이었다. 모든 편의를 봐주셨고 저녁에 학원에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검정고시 학원이 밀집한 서울 신설동으로 향했다. 처음에 그곳으로 가면서 시각장애인을 학생으로 받아줄 학원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고려검정고시학원 문상주 학원장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특히 학원의 강성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적극 지도해주셨다. 나는 이 학원에서 학원생 2000여명 가운데 1, 2위를 반복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를 보게 된 것도 원장님과 학원 선생님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었다. 문 학원장님은 서울시교육청을 찾아가 민원을 했다.  


1985년 8월 나는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검정고시는 서울 석관중학교에서 감독관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치렀다. 내가 처음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시각장애인 검정고시 응시가 줄을 이었다. 


이듬해인 1986년 11월엔 학력고사를 치렀다. 학력고사는 감독관이 옆에서 문제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점자 시험지를 통해 치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다. 나처럼 중도 실명자는 점자로 빨리 읽는 게 쉽지 않다. 결국 문제를 다 읽지도 못하고 답안을 제출했다. 


시각장애인 중에서는 성적이 전국 1위였지만 서울대에 입학하기에는 부족했다. 지금은 특별전형이라는 게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단국대 특수교육학과에 가라고 했고 나는 순종했다. 선생님이 교사를 하도록 한 데는 다 뜻이 있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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