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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5> 미국인 부흥사 안수 받으며 ‘영의 세계’ 깨달아


한빛맹학교 설립자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아꼈다. 선생님은 내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 왔기 때문에 잘 가르치면 뭐든 해낼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한빛맹학교는 중학교 과정만 있고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학생들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 고교 진학을 위해 다른 맹학교로 옮겨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제자들을 잘 키워 다른 학교에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당시 한빛맹학교의 한 선생님이 내게 한빛맹학교에서 공부하지 말고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교장 선생님은 이를 알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을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후문이다. 


한빛맹학교에 와 보니 내 장애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학교에는 나보다 장애 정도가 심하고 복합적인 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이 측은해 용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사주곤 했다. 옥수수빵을 자주 사줬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은 나를 잘 따랐다.  


한빛맹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빛맹학교의 기숙사 격인 맹아원에서 진행된 새벽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특별한 신앙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불교에 가까웠다. 교회라는 데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예배는 낯설었다. 또 그 시간이 아까웠다. 공부하거나 잠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벽예배에 꾸준히 나갔다. 그것이 학교 규율이었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이 새벽예배 참석을 특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4년 어느 날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서울 잠실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 미국에서 오신 구텔 목사라는 분이 강사였는데 당시 이적을 자주 보여줬던 유명한 부흥사였다. 구텔 목사는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을 일일이 안수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통역이 옆에 있었지만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아임 블라인드(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벗 아임 낫 디스어포인티드 앳 블라인드네스(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이 원트 투 비 어 헬렌 켈러(나는 헬렌 켈러처럼 되고 싶습니다). 플리즈 기브 미 위즈덤, 커리지 앤드 인텔리전스(제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십시오).” 


구텔 목사가 안수하자 내 몸이 뒤로 확 밀렸다. 순간 확신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가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은 내게 꿈을 통해서 위로해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물에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삶의 역경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꿈은 생생했다. 


처음에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없어 맹학교에 온 것이 그렇게 속상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빛맹학교에서 신앙의 토대를 세웠고 하나님을 만났다. 물론 늘 감사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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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4> 아들의 시각장애 인정한 아버지 맹학교 입학시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내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오히려 힘든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야외수업이었다. 야외수업은 중학교 때보다 늘었다. 중학교 때는 체육만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교련이 추가됐다.


교련시간은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정상 시력을 가진 친구들도 교련복을 갈아입고 발목보호대인 각반 등까지 차고 나가려면 휴식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제시간에 운동장에 집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제식훈련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내겐 이런 것들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내게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었다. 다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느라 바빴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우리 두 아들의 시각장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조금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각장애는 사실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이처럼 힘겹게 생활하는 것을 보자 아버지도 현실을 직시하셨다. 게다가 동생 역시 점점 시력이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다량의 수면제를 구해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은 이 수면제를 나눠 먹고 방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아버지도 별말씀 없으셨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모든 설움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이웃에 사는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그분이 한곳에 누워있는 우리를 발견해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우리는 위세척을 하고 모두 살아났다. 


아버지는 이후 달라졌다. 이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일반 학교인 서울 우신고등학교에서 나를 중퇴시키고 여의도고등학교에 데려갔다. 여의도고등학교에는 약시학생을 위한 전용학급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내가 약시가 아니고 전맹에 가깝다며 입학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나를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데려갔다. 하지만 서울맹학교는 내가 점자를 모른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대전에도 맹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찾다 찾은 곳이 서울 북한산 아래 한빛맹학교였다. 


한빛맹학교는 고 한신경(1920∼1990) 권사가 설립한 특수학교다. 한 권사는 평생 시각장애인 복지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한빛맹학교에는 당시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또한 나는 점자를 잘 몰랐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고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니 서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빛맹학교를 찾아간 날이 겨울이었다.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아마 당시 서러운 마음에 그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한빛맹학교에 입학한 뒤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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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쿡] 밤엔 닫는 교회,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데가 없다


며칠 전 퇴근길에 집 근처의 한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고 이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입구 문에 ‘닫혔음’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그 다음 날 같은 교회를 갔습니다. 오후 10시가 안 됐을 것입니다. 다행이 닫혔다는 푯말은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리사무소에서 한 분이 뛰어 오시더니 “어디 가느냐”고 묻습니다. “기도하러 왔다”고 하자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교회에도 들렀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만의 특별한 경험인가 하여 지인 등에게 물었습니다. ‘문닫은 예배당’은 한국교회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굳이 예배당에 가서 기도해야 하느냐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니 아무 데서나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집중해서 기도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눈물 흘리며 매달리고 싶은 그런 날 말입니다. 


그런 날엔 기도원에 가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실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원은 작정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퇴근길에, 집에서 아이 재우고 기도하고 싶을 때는 근처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에 이 소식을 전했더니 ‘(그런 교회) 엄청 많아요’라는 댓글이 달립니다. ‘다 그래요’라는 댓글도 보입니다. 한 페이스북 친구는 “기도하러 근처 교회를 찾았는데 예배당 안쪽에서 어떤 분이 문고리를 잡고 안에 아무도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예배당 문을 닫는 이유는 많습니다. 도난, 방화, 화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또 비행 청소년, 노숙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올까 봐 문을 잠근다고도 합니다. 특히 새 성전의 경우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대안으로 교회의 일부 공간, 소예배당 등만 열어놓는 곳도 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교회가 많을 줄 압니다. 딱 꼬집어서 제시할 대안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는 기도의 집이므로 성도는 기도하고 싶을 때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예배당을 찾았는데 교회 문이 굳게 잠겨있다? 대안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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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3> 중학교 첫 시험부터 문제지 글자 안보여 절망


많은 기대를 안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좌절해야 했다.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교과서를 받았는데 과목 수가 늘어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교과서의 글씨가 너무 작았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책의 글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도와줄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거의 첫 시험이었던 것 같다. 문제지를 받았는데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인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감독 선생님께 문제지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새로 받은 문제지도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시험지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진 것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했다. 순간 두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살아온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일단 대충 시험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닥쳐올 인생에 대해 생각해봤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버거운 삶을 그려봤다. 


지금은 여건이 좋아져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 컴퓨터 음성지원을 통해 공부할 수도 있고 ‘점자정보단말기’라는 시각장애인용 노트북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저시력 학생들은 휴대용 확대 독서기나 고정식 확대 독서기를 사용해 책을 읽을 수 있다. 본인에게 잘 맞는 보조기기를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30여년 전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공부를 못해 성적이 떨어지자 주변에 소위 불량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태권도 등을 배웠고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름 몸은 탄탄한 편이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게 없자 싸울 때는 겁도 나지 않았다. 소위 ‘학교짱’과 주먹다짐도 벌였다. 그러면서 나도 불량학생이 돼 갔다. 성적은 꼴찌에서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런데 막상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걱정이 앞섰다. 공부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이러다 갈 곳이 없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구석에 박아뒀던 교과서를 다시 꺼냈다. 친구들은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비웃었지만 난 절박했다. 시력이 나빠 기술을 배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했다.  


당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치러야 했다. 연합고사에서 점수가 나쁘면 거리가 먼 고등학교나 야간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글씨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합고사는 양호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줘서 보았다. 


결과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점수를 얻었다. 인문계 합격선 안에 들은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중학교에서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자체로 한동안 화제에 올랐다. 나는 당시 동네에서 명문으로 통하던 서울 우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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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2> 일곱 살 때 술래잡기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나는 1966년 경북 금릉군 증산면 장전리라는 곳에서 세 살 터울의 동생을 둔 맏이로 태어났다. 금릉군은 행정구역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곳으로 아주 시골이다. 


할아버지는 동네 유지셨고 5남매를 두셨다. 아버지는 막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7세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사랑도 많이 못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살았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해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어 가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진 탓에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나와 동생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공부를 잘했다. 다만 둘 다 눈이 지독히 나빴다. 야맹증이 심해 밤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게 되면 손으로 휘휘 저어 앞에 사물이 있나 확인하며 다녔다. 그 모습이 친구들 눈에는 동굴 속에 사는 박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박쥐’였다. 


낮에도 잘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7세 때는 오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시절 흔한 놀이 중 하나가 ‘다방구’ 놀이였다. 전봇대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일종의 술래잡기다. 


그날은 내가 술래였다. 나는 친구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면서 구덩이에 빠졌는데 오물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구덩이를 보고 잘 피해서 다녔지만 나는 그 구덩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천천히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거의 목까지 잠겼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앞에 긴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꽉 잡고 빠져나왔다.


근처를 지나던 어른이 나를 보고 나뭇가지를 찾아 건넨 것이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몽둥이로 엄청 맞았지만 오물 구덩이에 빠졌을 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초등학생 때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이란 진단을 받았다.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하는 야맹증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 실명하는 병이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다닐 만했다. 구로초등학교 시절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제일 앞에 앉혔다. 교과서 글자도 커서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잘하자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0’이 무엇을 나타낸 것 같니?”라고 물으셨다. 아이들은 아직 자연수나 정수에 대한 개념조차 몰랐다. 그런 아이들에겐 버거운 질문이었다. 막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0은 자릿수를 의미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릿수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냐”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선생님의 격려는 두고두고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분은 유동찬 선생님으로 내 평생의 은사다. 어릴 때는 눈이 나빠 불편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좋았고 신났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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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양수 <1> 어둠 속에 살다 맹학교서 찾은 ‘희망의 빛’


시각장애인들이 졸업하는 맹학교 졸업식에도 희망은 있다.  


보통 장애인 특수학교 졸업식에는 학부모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졸업하는 아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한빛맹학교’ 졸업식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지난달 19일 진행된 한빛맹학교 졸업식에선 장애인들, 학부모들이 희망을 나눴다. 상급학교나 대학에 진학했다고 기뻐했고, 중도 실명한 중·장년들은 새로 배운 안마기술로 취업하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이날 한빛맹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전달했지만 나도 30여년 전에는 저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약시와 야맹증을 갖고 태어났다. 고1 때는 완전히 실명했다. 이전에도 눈이 너무 나빠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과 전혀 안 보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명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고1 때였으니 당장 공부를 하려면 점자를 배워야 했다. 점자는 생각보다 어렵다. 


당시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빛맹학교를 만났다. 내게 한빛맹학교는 단순히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준 곳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간이었다. 


한빛맹학교는 하나님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실명 후 맹아원에서 지내면서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의무사항이어서 빠지진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때의 예배가 내 신앙의 불씨가 됐다.


그렇게 만나기 시작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는 시각장애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위한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의 이사장, 한빛맹학교 교장, 사회적 기업 ‘한빛예술단’ 단장을 맡고 있다. 한빛예술단은 안마사가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한 학생의 바람을 듣고 만든 시각장애인 예술단이다. 


안마를 통해 생업을 이어가기를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안마소인 ‘힐링센터’도 지었다. 장애 정도가 심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을 설립했다. 교회는 장로로서 서울 한빛교회(김하영 목사)를 섬기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살았다. 그러다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그 빛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나는 한빛재단을 통해 내 안에서 발견한 그 빛을 세상에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빛이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비전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진학과 취업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66년 경북 김천 출생. 시각장애인 첫 대입 검정고시 합격. 단국대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박사과정 수료.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 역임. 현 한빛맹학교 교장, 한빛예술단 단장,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 이사장,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회장, ㈔한국사회복지법인협회 부회장,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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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총선 예비후보자들 “할랄단지 반대”


전북 익산의 4·13 총선 예비후보자 9명이 25일 익산 할랄식품 테마단지 조성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익산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이날 익산 천광교회(안홍대 목사)에서 열린 ‘4·13 총선 예비후보자 초청 할랄정책 소견발표회’에서 “익산 할랄단지 조성에 적극 반대한다”고 밝혔다. 발표회는 익산시기독교연합회(회장 문영만 목사)와 익산시할랄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전춘식 이을익 목사)가 공동 주최하고 전북기독언론인연합회(회장 김영만 장로) 등 전국 53개 단체가 주관했다. 


발표회에는 익산갑의 국민의당 배승철 이한수 정재혁, 더민주당 이춘석 한병도, 새누리당 임석삼 예비후보, 익산을의 국민의당 김상기 조배숙, 새누리당 박종길 예비후보가 참석했다.


이춘석 예비후보는 “정부가 할랄단지를 다시 추진하면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약속했다. 조배숙 예비후보는 “할랄단지가 조성되면 무슬림 대거 유입이 불가피하다. 분명하게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한수 예비후보도 “특정 종교의 식품단지로 전락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대통령이 ‘노’라고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길 예비후보는 “무슬림이 주도하는 할랄단지 조성에는 적극 반대하지만 지역 경제를 위해 할랄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점은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참석해 ‘할랄식품과 동성애 등 차별금지법의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유 전 지사는 “정부는 할랄식품이 일확천금을 낳는 황금알인 것처럼 국민을 호도하면서 할랄식품단지 조성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할랄식품단지가 조성되면 이슬람에 대한 차별금지 문제가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사탄은 동성애 옹호로도 이어지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선하게 보이는 악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가 할랄식품 단지 조성 백지화를 확실하게 결정해 공표할 때까지 반대 운동을 계속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표회 후에는 특별기도회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익산에 할랄식품 단지가 조성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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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N한국지부장 천태혁 선교사 "3D 성경 애니 '슈퍼북' 올해 9월 출시"


CBN이 제작한 3D 성경 애니메이션시리즈 ‘슈퍼북’이 오는 9월 국내에 출시된다. CBN은 1960년 펫 로버슨 목사가 미국 버지니아주에 세운 초교파 기독교방송네트워크다. 지난해 9월 국내에 한국지사를 설립했다.


슈퍼북은 디즈니 출신 애니메이터와 신학자들이 12년에 걸쳐 만들었으며 전세계 75개국에서 1억1800만명이 시청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시리즈다. 


슈퍼북 국내 출시를 책임지고 있는 CBN한국지부장 천태혁(46) 선교사는 27일 “슈퍼북은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며 “다음세대에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즈니의 ‘라이온 킹’ ‘뮬란’ ‘미녀와 야수’의 제작진이 만들어 재미있고 작품 수준이 높습니다. 이 슈퍼북을 통해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이민교회, 선교지, 특히 북한 아이들이 성경에 관심을 갖고 영적으로 깨어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천 선교사는 복음성가 ‘아주 먼 옛날’의 작사·작곡가로 알려진 찬양 사역자다. 국제기독학생운동(샘) 국제대표, 유스코스타 국제총무를 지냈다. 


슈퍼북은 시즌 1, 2, 3 등 총 3개의 시즌으로 구성돼 있다. 2017년을 목표로 시즌 4가 제작 중이다. 각 시즌은 1년 40주 과정의 3개의 레슨으로 이뤄져 있다. 


레슨 1은 성경 에피소드를, 레슨 2는 에피소드의 배경 및 역사성을 다룬다. 레슨 3은 레슨1과 2를 종합해 예수와 연결해 복음 메시지를 전한다. 


천 선교사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크리스’ ‘조이’라는 남녀 주인공과 ‘기즈모’라는 로봇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고 설명했다. 또 “주일학교 아이들 양육을 위해 동영상 파일과 해설 책자, 제자훈련 커리큘럼 등이 하나의 세트로 구성돼 있다”며 “이 모든 것을 현재 제작 중인 한국 CBN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어 유용하고 편리하다”고 강조했다. 


슈퍼북은 2D와 3D 시리즈가 있다. 2D 시리즈는 CBN이 1981년 일본 전도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했다. 당시 일본은 성경의 기초가 전혀 없는 ‘성경적 문맹지’였다. 복음을 전하려면 성경의 전반을 이야기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2D 만화시리즈 ‘슈퍼북 인 플라잉 하우스’였다. 이는 일본 TV에 방영돼 엄청난 인기를 끌어 일본 전역에서 800만명이 시청했다. 이어 북미, 남미, 러시아로 퍼져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5억명이상이 시청했다. 


이번에 한국에 보급되는 슈퍼북은 3D 시리즈로 교회 주일학교용이다. 5월에 30여개 교회를 시작으로 시험 과정을 거친 후 선착순 모집에 들어간다. 지역교회를 섬기기 위해 교회에 판매하지 않고 후원방식으로 배포할 예정이다. 


천 선교사는 “영리 목적으로 콘텐츠가 제작 확산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정기 후원자를 모집해 제작·보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70% 이상이 15세 이전에 복음을 접한 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어릴때 복음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다음세대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슈퍼북 보급에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02-6933-0414).”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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