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체인점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척척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쉬운 사업은 없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됐는데 남는 장사를 하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초기 자본이 필요했다. 당장 사무실이 필요했다. 상담도 해야 했고 업무용 책상도 놔야 했고 교육도 해야 했다. 시간을 아끼려면 사무실은 무교동 스낵카 근처에 있어야 했다.
무교동의 임대료는 비쌌다. 이런저런 것을 따져 보니 최소한 1억원이 필요했다. 생계만 유지하고 남는 돈은 이웃을 위해 썼기 때문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행이 노점상에게 대출해줄 리도 만무했다. 지인 중 한 분이 석봉토스트를 믿고 투자했다. 무교동에 사무실을 냈다.
나는 오전에는 스낵카에서,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했다. 사무실에서는 사업설명회를 하고, 가맹계약을 맺으면 교육을 했다. 재료 준비하는 과정, 토스트 굽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체인점에 재료도 공급했다. 나는 좋은 재료만 고집했다. 특히 치즈 햄 등은 유명 브랜드 제품만 썼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그래야 식중독 등 문제가 생기면 해당 기업이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기업 제품을 대량 구매하고자 했다. 대기업을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다. 제품을 정기적으로 납품해 달라고 하자 담당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도매상 제품을 체인점에 납품했다. 나중에 석봉토스트가 더 유명해지자 그 대기업 담당자가 석봉토스트에 제품을 납품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스낵카는 0.8t트럭을 개조했고 석봉토스트 로고를 붙였다. 여름에는 모기장을, 겨울에는 방풍비닐을 설치했다. 트럭 개조 등 전문적인 부분은 업체에 맡겼지만 대부분 내가 했다. 밤새는 일도 많았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여섯 달 동안 체인점을 100여개로 확장했다. 2004년 8월 가맹사업을 시작해 2005년 3월 즈음 투자받은 돈 1억원을 다 갚았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체인점을 낼 때 받는 가맹비 노하우비 등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돈이 없어 노점상을 하려는 이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트럭을 스낵카로 개조하고 빵 굽는 시설을 설치하는 데 따른 시설비가 약간 남았다. 가맹비 등을 받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가게 10평 기준으로 4000만∼5000만원만 있으면 석봉토스트를 낼 수 있다.
나는 체인점만 내주는 게 아니고 오픈기념 이벤트도 해줬다. 새로운 체인점에서 직접 토스트를 구워주며 손님들과 덕담을 나눴다. 나름 유명했기 때문에 손님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그즈음 무교동의 석봉토스트는 접었다.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의 노점상들이 모두 없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노점을 접었다.
외국인을 위한 관광가이드북에도 소개됐는데, 내가 장사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무교동의 석봉토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지금 같으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자고 했을 텐데 말이다. 사무실도 무교동에서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옮겼다. 현재 사무실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다. 가맹비도 안 받으면서 유지하기에는 무교동의 사무실 임대료는 너무 비쌌다. 가맹점은 많이 냈지만 금전적인 것만 생각하면 실속은 없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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