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생생하다. 카라스키야와의 3회전. 카라스키야가 왼손 연타를 칠 때 나는 있는 힘껏 라이트훅을 날렸다. 안 맞았다. 이어 때린 왼손 더블 펀치는 상대의 배와 턱에 적중했다. 그때 내 눈에 카라스키야의 두 무릎이 들어왔다. 반쯤 주저앉았다 일어났다.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시 들어가면서 원투를 쳤다. 오른손이 적중했고 홀딩 상태가 됐다. 그때 걷어 올린 두 번의 짧은 오른손 어퍼컷이 결정타였다.
카라스키야의 눈동자를 보고 링 구석에서 계속 몰아붙였다. 자꾸 주먹이 빗나가 상대를 약간 누르듯 공격했다. 두 번이나 그랬다. 주심은 내게 주의를 주며 카라스키야를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판에 카라스키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대로 시합이 끝났다. 4전5기.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의 말씀대로 나는 이겼다.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다.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LA에 도착해 교포들과 만났다. 2년 반 전 자모라에게 졌을 때의 슬픔 대신 기쁨을 남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747점보기의 기장이 “기내에 파나마에서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가 있다”고 방송하자 승객들이 환호하며 박수쳤다.
1등석에 앉아 아버지를 회상했다. 할머니도 생각했다. “너희들은 예수님 믿어야 돼, 예수님 믿으면 복 받아.” 자주 그렇게 말씀했다. 그래서 적지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이 됐나 싶었다. 한 번은 남아공에서 한 번은 파나마에서.
이기긴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남들은 ‘4전5기’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내가 싸웠던 영상을 보지 못했고 무슨 주먹으로 카라스키야를 KO시켰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큰 트로피를 내 옆에 세우고 승무원들과 축하사진을 찍었다. 즐겁긴 했지만 내가 이긴 것 같지 않고 누군가 나를 이기게 해준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룰 미팅 때 왜 룰이 바뀌었을까. 당초 3번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로 인정하던 룰이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다. 체중을 재고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떻게 심판을 만나게 됐을까. 네 번 다운당한 후 실컷 맞고 있을 때 선수 보호 차원으로 경기를 중단시켰다면. 큰형은 종 치기 바로 전에 수건까지 던지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 서소문 TBC 동양 방송국에 걸린 현수막 글귀가 재미있다. ‘불사신 홍수환’.
1974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열린 카퍼레이드보다 환영 인파가 2배 더 많았다. 시청 축하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때 비로소 시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심판의 카운트는 분명히 느렸다. 나를 봐주듯 했다. 세 번째 다운당해 로프에 기댔을 때 심판이 내게 다가왔다. 보통은 선수에게 오라고 부른다. 네 번째 쓰러졌을 때 심판이 내게 와서 물었다.
“You OK(괜찮나)?” “Slippery(미끄러졌어요).”
이 부분이 가물가물 생각났다. 심판은 미끄럽다고 들었을까, 미끄러졌다고 들었을까.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이번 승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로프 쪽에 몰아놓고 때리는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있는 힘을 다해 치는 무지막지한 연타였다.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켰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다.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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