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홍수환 (7)
[역경의 열매] 홍수환 <13> 4전5기 기적의 승리… 나 아닌 하나님의 작품

기억이 생생하다. 카라스키야와의 3회전. 카라스키야가 왼손 연타를 칠 때 나는 있는 힘껏 라이트훅을 날렸다. 안 맞았다. 이어 때린 왼손 더블 펀치는 상대의 배와 턱에 적중했다. 그때 내 눈에 카라스키야의 두 무릎이 들어왔다. 반쯤 주저앉았다 일어났다.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시 들어가면서 원투를 쳤다. 오른손이 적중했고 홀딩 상태가 됐다. 그때 걷어 올린 두 번의 짧은 오른손 어퍼컷이 결정타였다. 

카라스키야의 눈동자를 보고 링 구석에서 계속 몰아붙였다. 자꾸 주먹이 빗나가 상대를 약간 누르듯 공격했다. 두 번이나 그랬다. 주심은 내게 주의를 주며 카라스키야를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판에 카라스키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대로 시합이 끝났다. 4전5기.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의 말씀대로 나는 이겼다.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다.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LA에 도착해 교포들과 만났다. 2년 반 전 자모라에게 졌을 때의 슬픔 대신 기쁨을 남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747점보기의 기장이 “기내에 파나마에서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가 있다”고 방송하자 승객들이 환호하며 박수쳤다.

1등석에 앉아 아버지를 회상했다. 할머니도 생각했다. “너희들은 예수님 믿어야 돼, 예수님 믿으면 복 받아.” 자주 그렇게 말씀했다. 그래서 적지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이 됐나 싶었다. 한 번은 남아공에서 한 번은 파나마에서.  

이기긴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남들은 ‘4전5기’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내가 싸웠던 영상을 보지 못했고 무슨 주먹으로 카라스키야를 KO시켰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큰 트로피를 내 옆에 세우고 승무원들과 축하사진을 찍었다. 즐겁긴 했지만 내가 이긴 것 같지 않고 누군가 나를 이기게 해준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룰 미팅 때 왜 룰이 바뀌었을까. 당초 3번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로 인정하던 룰이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다. 체중을 재고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떻게 심판을 만나게 됐을까. 네 번 다운당한 후 실컷 맞고 있을 때 선수 보호 차원으로 경기를 중단시켰다면. 큰형은 종 치기 바로 전에 수건까지 던지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 서소문 TBC 동양 방송국에 걸린 현수막 글귀가 재미있다. ‘불사신 홍수환’. 

1974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열린 카퍼레이드보다 환영 인파가 2배 더 많았다. 시청 축하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때 비로소 시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심판의 카운트는 분명히 느렸다. 나를 봐주듯 했다. 세 번째 다운당해 로프에 기댔을 때 심판이 내게 다가왔다. 보통은 선수에게 오라고 부른다. 네 번째 쓰러졌을 때 심판이 내게 와서 물었다. 

“You OK(괜찮나)?” “Slippery(미끄러졌어요).” 

이 부분이 가물가물 생각났다. 심판은 미끄럽다고 들었을까, 미끄러졌다고 들었을까.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이번 승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로프 쪽에 몰아놓고 때리는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있는 힘을 다해 치는 무지막지한 연타였다.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켰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다.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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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2>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


홍수환 장로가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카라스키야전에서 4전 5기로 상대를 다운시킨 모습.


드디어 시합 날. 링 위에서 진행된 계체량을 통과하고 빨리 방에 올라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기에서 내 시합 심판인 미국인을 만났다.

“Hey, soo! I’m the referee. Good luck today(수환, 내가 심판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Thank you, but I’m ready for this fight(고마워요. 나는 준비가 돼 있습니다).”

“Where did you learn English(영어 어디서 배웠어요)?”

“High school(고등학교에서요).”

이 짧은 만남은 기적을 만들었다. 왜 시합 하루 전 룰 미팅 때 무제한 다운으로 바뀌었을까. 왜 시합 날 엘리베이터에서 심판을 만났을까. 경기가 끝난 이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합을 앞두고 나는 라커룸에서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아나운서 박병학 장로가 나타났다. “수환아, 오늘 시합 네가 이겨. 상대는 펀치가 세지만 턱은 약해. 너는 펀치가 좀 약해도 대신 맷집이 좋잖아. 자모라 봐라, KO로 졌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 안 쓴다.”

나는 이마에 땀이 약간 흐르도록 몸을 풀고 코트라에서 빌린 우리나라 고유의 삿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링 위에 올랐다. 카라스키야도 등장했다. 초록색 가운을 입고 올라온 그의 모습은 이미 챔피언이었다. 애국가가 흐르고 결전의 시간이 왔다. 복싱 선수에게 언제가 제일 긴장되는 순간일까. 바로 ‘세컨드 아웃’이다. 선수 둘만 남으라고 할 때다.

“수환아, 5회전만 넘기면 이 싸움은 네 거다.”

조순현 선생님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링 중앙으로 뛰쳐나갔다. 상대 상체 놀림이 부드러웠다. 주먹도 생각했던 대로 빠르고 가벼웠다. 그리고 강했다. 이제껏 상대를 5회전 안에 모두 보내버린 그런 주먹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다. 5회전 안에 끝내자. 그게 편하겠다.’ 그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1라운드는 잘 싸웠다. 운명의 2라운드. 상대의 전광석화 같은 왼손이 나올 때 나는 라이트훅으로 응수했다. 아뿔싸! 상대가 오른손 어퍼컷과 왼손 훅으로 나를 받아쳤다. ‘걸렸구나!’ 링 밖에서 선생님이 외쳤다. “침착해!”

나는 이미 링 바닥에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쓰러졌다. 그 정도 되자 파나마 관중은 게임이 이미 끝난 줄 알고 축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심판이 나를 살렸다. 카운트를 천천히 셌다.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때 종이 울렸다. 2회전 끝.

종소리를 듣고 겨우 코너로 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꺼내 마시게 했다. 미제 군용 암모니아였다. “정신 나게 하는 거다.” 너무 독해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쭉 마셔. 1회전만 더하고 하지 마!”

‘그래, 1회전만 더하고 그만하자.’ 그러고 나서 앞을 보니 상대 코너의 링 줄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신이 좀 든 것이다.

“1회전만 하고 관둬.” 선생님이 또 외쳤다. 선생님은 눈물을 참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릴 기세였다.

“세컨드 아웃.”

선생님은 “수환아, 옥희도 보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링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래. 총을 맞더라도 등에 맞지 말고 앞가슴에 맞고 전사하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소가 너를 받는 게 아니야. 네가 겁먹으니까 소한테 받히는 거지’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겁이 나를 죽이는 거야. 네 주먹 별거 아니야.’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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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1> 국내 방송사 카라스키야戰 KO패 우려 중계 꺼려

누나에게 들은 어릴 때 이야기다. 누나 등에 업혀 미군 지프에서 던지는 초콜릿을 받으려다 개천에 떨어졌다. 누나가 내려가 보니 하나도 안 다쳤다. 누나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이를 본 사람이 엄마에게 얘기해서 크게 혼났다고 했다. 

조금 더 자라선 신문 배달하는 동네 형들을 따라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를 부르고 다녔단다. 얼마나 까불었는지 서울 돈암동에 살 때 군인이던 외삼촌이 집 앞에 세워 놓은 트럭에 동생과 올라 장난치다가 큰 사고를 내기도 했다. 이것저것 만졌는데 트럭이 움직이더니 내리막길로 달렸다. 그래서 남의 집을 부숴버렸고 이로 인해 신문 사회면에 처음 이름이 올랐다. 개구쟁이였지만 누나는 항상 내 편이었다. 시합을 앞두고 나를 격려했다. 

“수환아 넌 이겨, 엄마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폭격이 심했는 줄 아니. 그런 속에서도 넌 살았어.” 

엄했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읽으셔서 그런가, 비참하게 맞고 쭉 뻗어버린 시합은 없었다. 아니면 신의주 제2교회를 섬겼던 할아버지의 헌신이 4전5기 시합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3번을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패 하는 룰이 있었다. 카라스키야 측은 룰 미팅에서 ‘무제한 다운 룰’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어차피 KO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나 또한 판정을 원치 않았다.

당시 파나마엔 세계 복싱영웅인 로베르트 두란 선수가 있었다. 카라스키야의 인기는 두란을 능가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다. 나는 그들 파티에 제물이었다.  

파나마는 더웠기 때문에 한 체급 올린 체중 감량엔 무리가 없었다. 남은 1주일은 시합 때 있는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도록 말수조차 줄여야 한다. 그때 한국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시합 1주일 전인 11월 20일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세계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김태호 선수가 상대 선수 세라노를 다운시키고도 10회전에서 KO로 졌다고 했다.  

또 다른 소식도 들렸다. 같은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파나마의 루한 선수가 자모라를 10회 KO로 이겼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복싱의 나라였다. 사파타, 루한, 두란에 이어 카라스키야까지 세계 챔피언이 된다면 파나마는 세계 챔피언 4명을 보유한 복싱 강국이 되는 것이다. 

복싱 연령으로는 늙은 나이 27세, KO율 30%인 내가 그들 잔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국에서는 이 시합을 중계방송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나 마나 뻔한 KO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싱을 좋아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1주일마다 한국선수가 KO로 지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김태호 선수의 시합을 중계했던 TBC 박병학 아나운서와 김재길 체육국장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홍수환 시합은 꼭 중계하겠다, 홍수환이 지면 국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다. 

온 국민이 복싱을 좋아했다. 세계 복싱계의 동향은 물론 선수 랭킹까지 줄줄 외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판치라인’이라는 복싱 전문지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카라스키야전 중계가 결정됐다. 계체량도 통과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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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밴텀급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2㎏ 더 올려 주니어 페더급에서 힘 좀 써보자.’ 이런 각오로 연습량을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랐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와 싸운다는 건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했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희망을 못 줄지언정 “질 거면서 거기까지 왜 가냐”는 식이었다. 한 선배는 내가 콜롬비아 선수에게 KO로 패했을 때 “일어나서 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안 일어났다”고까지 했다. 복싱이라고는 1회전도 뛰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나.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제재소에서 사온 통나무를 쪼개며 힘을 키웠다. 샌드백이 ‘ㄱ’자로 꺾일 만큼 펀치력도 키워 나갔다. 신도체육관 조순현 관장에게 어깨 힘 빼는 법도 배웠다. 

시합을 앞두고 권투위원회 회장님과 한 제과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지더라도 잘 싸우고 와라. 오렌지 주스 하나 마셔.” 

적지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치르러 가는데 지더라도 잘 싸우고 오라니. 체중 조절하는 선수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하다니….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란 듯이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는 기관총으로 탱크 쏘러 가는 바보다.’ 이를 악물었다.

만나는 상대가 모두 KO승을 자랑했다. 태국 수코타이 18승 16KO승, 자모라 26승 전승 KO승, 카라스키야도 아마추어 전승으로 11승 모두 KO승이었다. 내 승률은 희박했다. 공항에 나온 가족들에게 필승을 다짐하며 비행기를 탔다. ‘이게 마지막 시합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테말라, 파나마로 가는 항로였다. 이기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탱크에 기관총 쏘다 오느냐의 문제였다. 비행기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서 벌어진 동네 복싱시합을 보러 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나와 같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그때까지 47번을 싸우면서 시합마다 경기 전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시합을 마치면 또 산소를 찾았다. 모두 94번이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앞두고도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자마자 “아버지가 그렇게도 예뻐하시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어릴 때 막내 여동생이 집에서 기르던 하얀색 큰 불도그에게 목이 물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고 어린 여동생을 구했다. 이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수환이 순발력이 엄청 빠르네.” 여동생에게 가까이 있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랐다. 

할머니 생각도 났다. 서울 돈암동에서 살 때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항상 책을 읽었다. 표지는 검정색, 옆은 빨간색인 작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하나님 말씀 책”이라고 하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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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9> “네가 이겼으면 문제 없었잖아” 조롱에 이 악물어

자모라 선수와 경기를 끝낸 다음 날 서울 남영동 ‘두꺼비체육관’을 찾았다. 인천구치소에 가 있는 형을 생각했다. 그 경기 9회전에서 멕시코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다가 그 장면이 사진에 찍히는 바람에 구속된 것이다. 

자모라 선수의 짧은 왼팔이 어떻게 내 오른쪽 턱뼈를 금 가게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체육관의 한 선배에게 물었다. “형, 내가 왜 그놈 왼손에 그리 맞았지?”

“아니, 네가 그걸 몰라?” “모르겠는데….” “네가 왼손을 뻗으며 들어갈 때 그놈이 왼쪽으로 돌면서 왼손을 뻗었어. 그러니까 들어갈 때마다 오른쪽 턱이 맞더라고.”

‘돌면서 치니까 내 오른손 가드 사이로 파고들면서 오른쪽 턱을 맞힌 거구나.’

그 선배가 또 말했다. “수환아, 내가 보기엔 네 체중도 문제야. 네 몸에 밴텀급은 무리야, 잘 생각해 봐라.” 

한동안 턱이 아파 잠을 못 잤다. 인천구치소에 있는 형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왔다.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를 봤다. 미국 LA에서 자모라에게 질 때 받은 8만 달러, 4000만원에서 트레이너 두 명 800만원, 매니저 한 명 1200만원을 떼어주고 나머지 2000만원으로 해방촌 목욕탕을 샀다. 자모라를 한국으로 부를 때 이 목욕탕을 팔았다. 돈이 모자라 종로에서 양복점을 하던 이일호 복싱 원로의 도움을 받았다.  

신문 기사는 나를 놀렸다. ‘막 내린 홍수환 시대’ ‘역시 자모라’…. 어느 누구도 억울했던 9회전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결과만 놓고 따졌다. 형님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하는 말. “네가 이겼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잖아.” 

귀찮다는 식이었다. 복싱이 크게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커피 한잔 대접받지 못했다. 건성으로 인사만 하고 나와 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상대에게 맞은 상처로 엉망인 내 얼굴을 봐서라도 봐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큰누나를 찾아갔다. 누나에게 비행기값이라도 달라고 해 외국에 가서 경기하고 이겨서 돌아오고 싶었다. 누나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여성 두 분이 나를 알아봤다.

“어머, 홍수환 선수다. 얼마나 아프세요? 한 번 더 도전하세요.”

그날 나는 두 번 울었다. 인천 검사실 앞에서 억울해서 한 번, 누나 가게 앞에서 감격해서 한 번 울었다. 큰누나에게 돈을 얻어 하와이로 향했다. 일본인 프로모터에게 가서 경기 주선을 부탁했다. 

‘한 번 더 해보자. 반드시 이기리라. 이겨야 원수를 갚는 거다.’ 

상대는 필리핀의 바스케스라는 선수였다. 뛰고 또 뛰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달렸다. 아침에 일어나 뛰는 것은 복싱 선수에게 산삼과 같다. 만장일치로 이겼다.  

그즈음 WBA에서 주니어 페더급을 새로 만들어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귀국해서 염동균 선수와 일본 다나카 선수를 이기고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11전 11승 11KO승의 파나마의 괴물 선수 카라스키야와 한판 붙게 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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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8> 심판의 편파 진행… 자모라에 설욕 무산

자모라 선수와의 대전료는 12만 달러였다. 1년 반 전 미국 LA에서 방어전할 때 받은 8만 달러보다 4만 달러를 더 줘야했다. 나는 내 돈 4만 달러를 들여 자모라를 불러들였다. 

‘내가 미국 가서 졌으니 너도 와서 깨져봐라.’ 

문제는 체중이었다. 한계 체중 53.520㎏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1년 반 전에도 결국은 체중 실패로 꿀 먹고 취해서 타이틀을 뺏긴 것 아닌가. 나이는 26세가 됐고 체중은 점점 빼기 어려워졌다.

어쨌든 사력을 다해 연습했다. ‘복싱이라는 것이 꼭 주먹만 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 전에 먹은 꿀 때문에 졌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다. 드디어 시합 날 아침 간신히 한계 체중을 통과했다. 자모라도 쉽지는 않았던지 얼굴이 핼쑥했다. 체중을 잴 때 팬티까지 벗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자 더 잠이 오지 않았다. 

1976년 10월 16일 오후 5시 인천 선인체육관. 관중은 꽉 들어찼다. 1회전. 아뿔싸! 슈즈 신은 것이 잘못됐다. 강한 이미지를 보이려고 까만 슈즈를 신고 링에 올랐는데 안쪽 밑창이 반질반질해 내 양말이 미끄러져 안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엄지가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신발을 신고 시합했을까.’ 양말이 두꺼우니 신발을 벗고 했어야 했다. 아차 싶었다.  

상대의 복부를 노렸다. 자모라가 빠지면서 왼쪽 어퍼컷을 날렸다. 내 이마에 적중했다. ‘이거 봐라’싶었다. 1년 반 전의 주먹이 아니었다. 

울분의 주먹 홍수환, 100% KO승률을 유지하려는 자모라의 시합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양발 엄지의 통증이 심해졌다. 운명의 라운드인 9회전 내가 뻗은 원투 스트레이트에 자모라가 걸렸다. 링 쪽에서 빠져나오려다 링 줄에 걸렸다. 다시 한번 들어가 때리려는 순간, 심판이 끼어들어 등으로 막았다. 

심판은 멕시코 사람이었다. 멕시코 선수와 세계 타이틀 매치를 하는데 멕시코 심판을 부르다니…. 제3국인 일본 심판 등을 불렀다면 나는 당연히 9회에서 KO승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아쉬운 9회전이었다.  

11회전. 발도 아팠고 빼기 어려운 체중을 억지로 뺐더니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자모라도 10회전을 뛴 경험이 없었다. 그 역시 체력이 소모됐다. 11회전 끝 무렵이었다. 내가 코너에 몰렸다. 

다행히 “땡!”하고 종이 울렸다. 나는 내 코너로 들어가려 했다. 자모라는 종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공격했다. 30초나 지연됐다. 코너에 들어가 마우스피스만 갈아 물고 나와야 했다. 

운명의 12회전. 다시 코너에 몰려 자모라의 연타를 맞았다. 견딜 수 있었다. 펀치력은 약해도 강한 맷집이 있었다. 그런데 심판이 끼어들더니 자모라의 손을 들어버렸다. 한 번의 카운트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관중들이 링을 점령했다. 내 형은 심판의 멱살을 잡았다. WBA는 결국 무효 경기(no contest)를 선언하고 재시합을 하기로 했다.  

자모라.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나보다 키도 작고 팔도 짧은데 어떻게 내 오른쪽 턱을 강타할 수 있었을까. 그 근본 원인을 알아야 했다. 물론 엄지발가락이 아팠던 것, 잠 한숨 자지 못한 것, 멕시코 심판이 온 것, 11회전이 끝난 후 30초간 연타를 맞은 것,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12회전에 나온 것 등 정말 억울한 일이 많았지만 말이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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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1966년 6월 25일 나의 복싱 영웅이 탄생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그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별로 없던 시대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다니던 중앙고 보이스카우트 행사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TV로 봤다. 그다음 날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도 갔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복싱을 좋아하는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를 가져다 놓겠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마추어 시합에 두 번 나갔다. 두 번 다 졌다. 바로 프로무대에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김준호 선수가 내 아마추어 경기를 보고 조언도 해줬다. 

69년 5월 10일 대구 출신 김상일 선수와 겨뤘다. 경험이 많은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첫 프로경기에선 무승부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합은 서울 청량리 신도체육관 소속 최창배 선수와 만났다. 그때 심판 전원일치로 첫 승을 거뒀다. 1승을 한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지지했다. 

당시 한국 밴텀급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나는 이를 놓고 부산 출신 문정호 선수와 결정전을 가졌다. 5회에서 라이트 어퍼컷과 훅의 연타로 KO승을 거뒀다. 데뷔 1년도 안 돼 한국 챔피언이 된 것이다. 

복싱 판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밴텀급 챔피언은 멕시코의 괴물 올리바레스 선수였다. 동양 챔피언은 일본인 가네자와 선수였다. 이 둘이 세계 타이틀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됐다. 

나는 필리핀 알 디아즈와 결정전을 벌였다.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였다. 이 시합에서 나는 판정으로 이겼다. 정말 갑작스레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까지 거머쥐게 됐다. 

패배도 있었다. 1970년 6월 9일 일본 원정 시합에서의 첫 패배는 한이 됐다. 상대는 일본의 파이터 하라다 선수 동생이자 당시 세계 밴텀급 랭킹 4위였던 우시와카마루 하라다 선수였다. 일본 규슈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아깝게 판정으로 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선수를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불러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완벽 승리였다. 그 선수가 병원에 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는 방송 카메라의 관심을 받았다. 

엄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인천 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안에서 카투사 식당을 했다. 엄마는 버터와 치즈를 허리춤에 차고 나와 내게 주셨다. 나는 버터를 좋아했다. 엄마가 주는 버터를 밥에 비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자식사랑은 대단했다. 나뿐만 아니고 4남3녀 모두에게 말이다.

그즈음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동양 챔피언이 됐으면 복싱선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미군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론 취했다. 그동안 연습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연습은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복싱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매니저가 알고 내게 전화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사실 오늘날 홍수환을 만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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