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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7> 챔피언 벨트 뺏기고 귀대하자 영창행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그러나 핑계는 있다. 평상시 나를 좋아하시던 한 할아버지가 세계챔피언 2차 방어전 자모라 선수와의 경기를 앞두고 한국을 떠나 미국 LA로 가기 전 체육관에 꿀을 가지고 오셨다. 그 꿀이 화근이었다. 이 꿀을 공복에 먹고 링 위에 올랐고 그 꿀에 취해 있었다. 진짜 실력으로 자모라에게 졌다면 그로부터 1년 반 후에 26전 26승 26KO승의 자모라와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다시 시합할 이유가 없었다.  

시합 당일 계체량 장소를 찾았다. 시합을 주선한 오운모 씨로부터 계체량 장소를 들었지만 한참 헤매다 겨우 찾았다. 도착해보니 우리측 사람은 오씨 뿐이었고 상대 선수인 자모라는 이미 체중을 재고 갔다고 했다. 본래 계체량 때는 두 선수가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오기도 전에 체중을 재고 갔다는 것이다. 내가 챔피언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못 산다고 철저히 무시당한 것이다.  

시합은 미국 잉글우드 포럼에서 열렸다. 우리가 투숙한 장소는 LA시내에 있는 웨스턴호텔이었다. 시합시간은 오후 5시인데 정오에 체중 테스트를 통과했다. 밥을 먹고 소화시킬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반드시 공복으로 링에 올라갔던 나였다. 걱정이 됐다. 그래서 아예 아무것도 안 먹고 올라가기로 했다. 

한 재미교포 식당에서 준비해준 삼계탕 국물이 먹은 전부였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소화가 안 돼 배가 출렁거리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보단 아예 안 먹고 링에 올라가는 게 휠씬 낫다고 생각했다. 등장할 시간이 거의 됐다. 차 트렁크를 열고 가운을 들어 올리는데 그 할아버지가 주신 꿀이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나는 그 꿀을 퍼 먹다시피 했다. 그 다음은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다. 속은 뒤틀리고 가슴은 답답하고 거리 감각도 떨어졌다. 꿀에 취한 것이다. 그렇게 4회전에서 KO를 당했다. 짧은 세계 챔피언 시대를 마감했다. 챔피언이 됐을 때 멋진 카퍼레이드와 정반대로 챔피언 자리를 내주자 혹독한 시련이 이어졌다. 수도경비사령부에 귀대하고 1주일간 자대 영창에 갔다. 

나는 ‘홍수환 후원회’ 회장인 정운수 박사를 찾아갔다. 은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링 위에서 쓰러지면 상대 선수가 못 때리게 말려주는 심판이나 있지. 인생에서 넘어지면 너도나도 더 짓밟으려고 난리야. 약해지지 마라.” 

사실 지금도 이 정신으로 산다. 링보다 무서운 인생, 하지만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상대를 때리고 상대에게 맞던 복싱 선수가 무슨 일이든 못할까. 

다시 시작했다. 나는 자모라 선수와 재대결할 수 있는 옵션을 갖고 있었다. 수코타이 선수와 자모라 선수가 경기를 벌이고 이 경기에서 이긴 사람과 재대결한다는 것이었다. 경기를 하고 승리를 거두며 자모라와의 재경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옵션은 무시됐고 시합도 무산됐다. 자모라 선수는 나를 이긴 후 8연속 KO로 챔피언 자리를 굳혀 나갔다. 

1975년 12월 23일 제대 후 나도 연승가도를 달렸다. 태국의 복싱 영웅 보코솔 선수를 다시 이기며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탈환했고 자모라 선수와의 일전을 학수고대했다. 76년 10월 16일 드디어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자모라 선수와 다시 맞붙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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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6> 2차 방어전에 18전 18KO승 철권이…

세계 복싱 경량급에서 가장 인기 높은 체급이 밴텀급이다. 모든 도전자들이 호시탐탐 내 타이틀을 노렸다. 첫 번째 도전자는 필리핀의 카바네라 선수였다. 이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며 1차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는 쉽지 않았다. 폭우를 앞두고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멕시코의 자모라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 입대 전 태국에서 수코타이를 고전 끝에 이길 때 매니저 다음으로 날 도와준 분이 있었다. 오운모씨다. 그분을 태국시합 끝난 후 오랜만에 만났다. 입대하고 14주의 훈련기간도 지난 이후였다. 

“수환아, 내가 요새 미국에 있어. 미국 프로모터 돈 프레이저 밑에서 매치메이커로 일하고 있는데 한국서 시합하지 말고, 넌 적지에서 강하니까 돈 두 배로 받고 미국에서 시합해라. 너 돈 좀 벌게 해줄게.” 

“좋지요.” 

“그럼, 미국 LA 교포들 많은 데서 타이틀매치를 하자. 거기 자모라라는 멕시코 선수가 있는데 뮌헨올림픽 은메달리스트야. 지금 18전 18승, 18KO승인데 내가 볼 때는 네가 충분히 이기고도 남아. 어때, 한번 해볼래?” 

구미가 당겼다. “얼마 받을 수 있어요?” 

당시는 세계적으로 밴텀급 타이틀전이 4만 달러 정도면 이루어졌다. 1달러에 500원인 시절이었다.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200만원이면 서울 후암동 변두리, 용산고 입구, 해방촌, 남영동, 청파동, 갈월동 등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자그마치 8만 달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4000만원. 좋다고 했다. 진행하자고 했다.  

상대가 약해서 깔보는 것보다 상대가 강해서 긴장하는 게 낫다. 그래야 연습도 더한다. 맞아도 때려도 소위 복싱하는 맛이 났다. 

‘그래, 전승 전 KO승이라….’ 

긴장감이 온몸에 흘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때는 김준호 선생님 집에서 합숙훈련을 했는데 전 국민, 전 군인의 스타가 된 후엔 그게 어려웠다. 되레 시기를 받는 것 같았다.

복싱 연습을 하기 위해 서울 충무로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연세대 앞에 있는 고려체육관까지 군 트럭을 타고 다녀야 했다. 그것도 동료들과 트럭 안에 쪼그리고 앉아 이동했다.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되자 수경사는 전에 없었던 쓸데없는 것까지 신경을 썼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어렵게 했다. 나는 ‘제대가 얼마나 남았나’ 하고 날짜를 세곤 했다. 

행복지수로 따진다면 세계 챔피언이 아니었던 시절, 홍수환이 누군지도 몰랐던 그 시절 행복지수가 더 높았다. 복싱이 하기 싫어졌다.  

그즈음 매니저를 바꿨다. 이전 매니저인 김주식씨는 그동안 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 고생해준 김준호 선생님께 부탁했다. 그랬더니 권투위원회는 내가 배신자라며 김준호 선생님을 권투 등록 선수에서 제명했다. 링에 오르기 전에 내란이 생긴 것이다. 

당시 한국은 세계 챔피언을 유지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됐건 오운모씨 중개로 2차 방어전을 위해 미국 LA로 향했다. 그동안 나와 호흡을 같이했던 김준호 선생님은 그냥 동행인 자격으로 따라갔다. 교포들은 열렬히 환영하면서 반드시 이겨달라고 소망했다. 그러나 나는 자모라 선수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4회전 KO패,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뺏기고 말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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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5>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드디어 공이 울렸다. 작전대로 몸을 최대한 흔들며 상대 선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널드 테일러의 스트레이트 펀치를 피했다. 그러면서 휘두른 왼쪽 훅이 상대를 강타했다. 1회에 다운을 시켰다. 이어 5회에 또 다운을 빼앗았다. 

‘그래, 내가 너를 이겨야만 우리 엄마가 식당에서 쟁반을 나르지 않는다.’ 이런 각오로 휘두른 주먹은 바람을 갈랐다. 계체량 때 나를 깔보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나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몇 회전인지도 몰랐다. 내 귀가 갑자기 뜨끈했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뭔가 흐르는 것도 같았다. 상대의 스트레이트에 내 귀가 찢어진 것이다. 그때가 6회였다. 이때부터 찢어진 귀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운명의 11회전, 심판이 시합을 중단시켰다. 귀에서 흐르는 피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를 커미션 닥터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시합을 중지시킨다면 끝인 것이다. 웬일인지 그는 시합을 계속하라고 했다. 흐르는 피로 봐선 중단시켜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 

‘시합은 이기든 지든 멋지게, 매력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리틀 알리’로 불리는 상대와 멋진 경기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 시합은 멋진 정도가 아니라 승리한 경기였다. 

나는 세계 챔피언을 적지에서 그것도 판정으로 이겼다. 김기수 선수 이후 8년간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한 세계 챔피언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초대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 그리고 그 뒤를 이은 2대 세계 챔피언 홍수환.”

어린 시절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복싱체육관에 들러 김기수 선수의 연습을 보곤 했었다. 그의 카퍼레이드도 보고 심지어 그가 다녔던 목욕탕까지 따라다녔다. 그런 홍수환이 이제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이다. 이를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이었다. 내가 김기수 선수의 세계 챔피언 뒤를 이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멋진 카퍼레이드 선물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2002년 월드컵 4강에 진출한 대표팀 빼곤 없을 것이다. 나는 혼자였고 월드컵 대표팀은 22명이었다. 인원수에 비례하면 시청 앞 내 카퍼레이드가 더 컸다. 

그때부터 정확히 8년 전 김기수 선수의 시청 앞 카퍼레이드를 보고 복싱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 자리에서 복싱팬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남아공 더반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뒤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이 전화 통화는 당시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김기수 선수 어머니가 그렇게 부럽더니만 네가 내 일생의 소원을 풀어주었구나. 대한국민 만세다!” 

한국에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육영수 여사도 만났다. 식사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바라던 훈장은 못 받았다. 다른 나라 시민권자로 해외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사람은 훈장을 받고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으로 적지에 나가 세계 챔피언이 된 나는 훈장을 못 받았다. 

지금도 ‘대한뉴스 992호’에 나오는 귀국 카퍼레이드를 보면 당시 국민들의 복싱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후 나는 전국을 누비며 ‘홍수환 복싱 시범’ 순회시합을 하고 다녔다. 그해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돌아가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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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4> 군 복무 중 세계챔피언 도전 위해 남아공으로

태국에서 수코타이전을 마친 뒤 얼마 지나 MBC TV프로그램 ‘챔피언 스카웃’이 수코타이전을 방송했다.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세계랭킹에 들어갔다.

나는 동양 챔피언이었으나 세계랭킹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수코타이는 동양 챔피언은 아니었지만 세계랭킹 6위였다. 마지막 8회전에서 사력을 다해 KO로 이긴 결과 나는 세계랭킹 4위가 됐다. 

1973년 2월 13일 얼굴의 멍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수색 30사단 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곳에서 6주 훈련을 받고 대전육군병참학교에서 8주 후반기 훈련을 받았다. 14주 훈련을 마친 후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에 배치됐다. 육군 일등병, 부대는 수도경비사 제5헌병대대 본부중대였다. 

수경사에서 몸무게를 재고 깜짝 놀랐다. 체중이 68㎏이었다. 14주 동안 훈련을 받으며 10㎏이 쪘다. 그즈음 훈련 기간 동안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던 매니저가 찾아왔다. 시합 일정이 있다고 했다. 이노우에라는 일본 선수가 상대인데 계약 체중이 55㎏이라고 했다. ‘아, 13㎏을 어떻게 빼나!’

별수 없었다.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체중 감량을 하고 시합에 나가서 3회 KO승을 했다. 입대 후 첫 승리였다. 당시 수경사에서는 시합에 나갔다 지면 영창에 갔다. 아니면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야 했다. 

당시는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없었다. 또 아마추어 복싱은 몰라도 프로복싱을 키우는 군부대는 없었다. 나는 프로선수였기 때문에 육군 일등병 신분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 밴텀급 타이틀전에 못갈 뻔했다. 

나는 상대 선수의 지목을 받았다. 당시 세계 밴텀급 챔피언이 된 남아공의 아널드 테일러가 나를 첫 지명 도전자로 택했던 것이다. 반공교육을 이틀 받고 일본으로 가서 남아공 입국 비자를 받은 후 홍콩, 실론, 세일추일스 군도,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시합 장소인 남아공 더반에 도착했다.

장장 35시간을 이동했다. 비행기를 타고 남아공까지 가면서 반드시 챔피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여행이 길면 길수록 각오가 더 굳어지는 듯했다. 오기가 생겼다. 김기수 선배 이후 7년 만에 세계타이틀전을 하러 가는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권투위원회에서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인이 관심을 가졌다. 김준호 선생님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국인 선교사 세 명이 공항에 나왔다. 또 엄마와 큰형 동생들이 배웅 나왔다. 

테일러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테일러를 이기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가 이겨서 귀국한다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더반에 도착했다. 35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김준호 선생님과 나는 더반에 있는 팜비치 호텔에 묵었다. 그곳에서 테일러의 시합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구부정한 큰 키에 스트레이트가 압권이었다. ‘계속 움직이자. 그것이 상대를 죽이는 거다.’ 김 선생님과 나는 초반부터 적극 공세에 나서기로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시합 날. 나는 처음으로 야외특설 경기장에서 경기했다. 그곳에서 우리 원양선원들도 만났다. 한쪽 링 사이드를 점령하다시피 앉아 있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이들을 보면서 김 선생님에게 얘기했다. “선생님, 내가 오늘 죽더라도 타월 던지지 마세요.” 그러자 김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냐. 넌 이겨, 오늘.”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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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3> 무패 전적 태국 선수와 붙어 8회 KO승

군에 가겠다고 연습 한번 하지 않던 그때 매니저가 전화했다. 

“수환아, 태국 가자.” 

“저, 복싱 그만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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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원 줄게, 가자.” 

매니저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60만원 이야기를 했다. 60만원이면 당시 큰돈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럼, 갑시다.” 

‘돈 벌어 엄마에게 땅을 사드리고 복싱을 때려치우자. 그리고 군대 갔다 오자’라고 생각했다. 1973년 2월 7일 상대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합 일자는 2월 9일이었다. 태국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상대가 수코타이 선수였다. 그는 태국 최고의 선수였다. 별명이 무언의 알리(Mute Ali)였다. 

시합은 태국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보코솔 선수와 필리핀의 살라바리아 선수 간 세계 타이틀 매치와 함께 진행됐다. 수코타이는 인기가 높은 데다 태국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나와 수코타이 간 동양 타이틀 매치가 그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메인게임이 됐다.

나는 링에 오르기 전 3회전까지 견디겠다고 각오했다.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하지 않았어도 3회전 9분까지는 버티리라. 그러고 안 되면 내려오겠다.’ 연습은 단 하루도 안 했다. 어차피 지난 일을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링에 올랐다. 태국의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2월과 상반된다. 우리는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여름 날씨 속에 태국민들의 열기를 한몸에 받고 링에 올랐다. 

수코타이의 주먹은 묵직했다. 역시 18전 18승 16KO승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선수였다. 나도 기죽지 않고 ‘너나 나나 3회전 안에 둘 중 하나는 쓰러지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뻗었다. 3회전, 상대도 안 보고 그냥 휘두른 주먹에 수코타이가 다운됐다. 태국 심판은 느리게 카운팅했다. 태국 왕이 관람하는 시합에서 자국 선수를 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다운시켰다. 역시나 느린 카운팅. 수코타이는 몰아치는 연타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필살의 주먹’을 휘둘렀다. 이와 함께 3회전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나도 지쳤다. 휘청거리며 다시 링으로 들어갔다. 숨은 헐떡거렸고 머릿속으로는 남아있는 라운드 수를 셌다. 연습 안 한 것을 그렇게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코타이에게 ‘나를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몸을 맡겼다. 

4회전, 한발 물러나며 받아 때린 오른손 어퍼컷이 적중했다. 수코타이는 한 번 더 다운됐다. 그도 국왕 앞에서 지기는 싫었던지 엄청난 반격을 했다. 내 얼굴도 멍이 들었다. 4, 5, 6, 7회전을 끝내고 코너로 들어오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나, 못하겠어요, 다음에 합시다.” 

매니저가 내게 말했다. “너, 돈 안 줘.” 

“언제는 돈을 잘 줬느냐”며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때리려고 하는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8회전, 나는 그 화를 수코타이에게 풀었다. 결과는 KO승이었다. 이 시합 영상을 보면 맨 마지막에 매니저가 승리한 나를 포옹하려 하는데 내가 밀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합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일어나 얼굴을 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귀국길 공항에서 ‘잠자리 선글라스’를 사서 꼈다. 선글라스를 벗자 비행기 승객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승리의 상처는 누가 뭐래도 좋았다. 아픈 줄도 몰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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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2> 프로 데뷔 1년 안 돼 ‘한국’ 이어 동양챔피언 벨트

1966년 6월 25일 나의 복싱 영웅이 탄생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됐다. 그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별로 없던 시대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다니던 중앙고 보이스카우트 행사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TV로 봤다. 그다음 날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도 갔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도 김기수 선수 같은 챔피언이 되겠다. 복싱을 좋아하는 아버지 묘지에 챔피언 벨트를 가져다 놓겠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마추어 시합에 두 번 나갔다. 두 번 다 졌다. 바로 프로무대에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김준호 선수가 내 아마추어 경기를 보고 조언도 해줬다. 

69년 5월 10일 대구 출신 김상일 선수와 겨뤘다. 경험이 많은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첫 프로경기에선 무승부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합은 서울 청량리 신도체육관 소속 최창배 선수와 만났다. 그때 심판 전원일치로 첫 승을 거뒀다. 1승을 한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복싱하는 걸 지지했다. 

당시 한국 밴텀급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나는 이를 놓고 부산 출신 문정호 선수와 결정전을 가졌다. 5회에서 라이트 어퍼컷과 훅의 연타로 KO승을 거뒀다. 데뷔 1년도 안 돼 한국 챔피언이 된 것이다. 

복싱 판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밴텀급 챔피언은 멕시코의 괴물 올리바레스 선수였다. 동양 챔피언은 일본인 가네자와 선수였다. 이 둘이 세계 타이틀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챔피언 자리가 공석이 됐다. 

나는 필리핀 알 디아즈와 결정전을 벌였다. 1972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였다. 이 시합에서 나는 판정으로 이겼다. 정말 갑작스레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까지 거머쥐게 됐다. 

패배도 있었다. 1970년 6월 9일 일본 원정 시합에서의 첫 패배는 한이 됐다. 상대는 일본의 파이터 하라다 선수 동생이자 당시 세계 밴텀급 랭킹 4위였던 우시와카마루 하라다 선수였다. 일본 규슈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아깝게 판정으로 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선수를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불러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완벽 승리였다. 그 선수가 병원에 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는 방송 카메라의 관심을 받았다. 

엄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챔피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인천 부평에 있던 미군부대 안에서 카투사 식당을 했다. 엄마는 버터와 치즈를 허리춤에 차고 나와 내게 주셨다. 나는 버터를 좋아했다. 엄마가 주는 버터를 밥에 비벼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자식사랑은 대단했다. 나뿐만 아니고 4남3녀 모두에게 말이다.

그즈음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동양 챔피언이 됐으면 복싱선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미군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론 취했다. 그동안 연습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연습은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복싱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매니저가 알고 내게 전화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사실 오늘날 홍수환을 만들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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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6·25전쟁 중 교회서 태어나

나는 챔피언이다. 복싱으로 한국·동양·세계 챔피언을 다 해봤다.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과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등 두 체급을 한국인 최초로 석권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15회 판정으로 이기고 어머니에게 전한 이 말이 한동안 회자됐다. 어머니는 그때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감격했다.  

‘4전5기’의 주인공.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결정전에서 상대를 3회 KO로 눌렀다. 4번 다운되고 일어나 이겼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고백하지만 내가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긴 경기들이었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나는 1950년 7월 11일 6·25전쟁 때 지금 서울 장충동 신광교회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나보고 ‘전쟁통에 폭격이 심한 날 교회에서 너를 낳았지’라고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독실했다. 돋보기를 내려쓰고 성경을 읽던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는 ‘제2교회’를 섬기셨다. 그 교회를 지을 때 못을 박으며 같이 지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후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의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34세 때였다. 할머니는 홀로 큰고모,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작은 고모 이렇게 넷을 키우셨다.


어릴 때 내가 복싱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복싱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관심이 많았다. 우리 동네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87번지였다. 지금 서울경찰청 맞은편이다. 나는 수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앞집에 복싱 선수가 이사를 왔다. 바로 김준호 선수였다. 아버지는 그의 엄청난 팬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김 선수의 복싱 시합을 보러가곤 했다. 김 선수가 1974년 남아공에서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김 선수와 호형호제하던 아버지는 복싱을 사랑했다. 김 선수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던 날 섭섭해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김 선수의 아들은 수송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 친구와의 작별도 참 아쉬웠다. 

아버지는 1964년 8월 4일 아주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와 같이 마루에서 주무셨는데 심장마비였다. 내가 열네 살로 중앙중학교 2학년일 때였다. 등굣길에 복싱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에 앉아 “어, 우리 육사생도 들어오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당시 남대문시장 입구에 있는 한 가게에 미제 복싱 글러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했고 모은다고 모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 글러브를 보면서 돈을 다 모으기 전에 누가 사가면 어쩌나 싶었다. 그리고 멀리 그 가게의 복싱 글러브를 보면서 ‘아직 안 팔렸구나’라고 마음 놓으며 집으로 향하던 생각도 난다. 

정리·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약력=△1950년 서울 출생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밴텀급·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WBA 주니어페더급 전 챔피언 △KBS 전 복싱 해설위원 △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현 구리 예빛교회(홍수철 목사)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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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회 탐방-태영건설 기독선교회] 회원 대부분 성령 체험한 독실한 신자… 우상숭배 고사 관행 없애


태영건설 기독선교회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태영건설 본사 13층 회의실에서 목요 정기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20여명이었지만, 이들의 “아멘” 소리는 유독 컸다.

설교자로 초청된 남회우(서울 성도교회) 목사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았다. 십자가에 집중한다면 선교회도 더 크게 부흥할 것”이라고 했다.

선교회 리더 박종철(48) 상무는 예배를 마친 뒤 “회원 대부분이 성령을 체험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며 “몇몇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치 ‘위장취업’한 것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선교회는 1994년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시작했다. 당시 여의도에 있던 자회사 SBS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95년 본사가 마포로 이전한 후엔 같은 건물에 입주한 꽃집 사장,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도 함께 모였다.

건설사 직원들은 대개 현장에 있다. 전체 직원이 계약직을 포함해서 1200여명이지만 본사에는 250여명이 근무한다. 예배에는 25명 정도가 모였다.

본사는 2007년 여의도로, SBS는 목동으로 옮겼다. 이후 선교회 인원은 크게 줄었다. 2명, 3명이 모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예배를 멈춘 적은 없었다.

2014년 말엔 ‘영적인 공격’도 받았다. 회사 감사팀이 “회사 공간에서 사적인 모임을 한다” “회사에 피해를 주는 것 아니냐”며 사내 종교활동 금지를 통보했다. 독실한 박 상무와 당시 안전팀장이 건설 현장에서 자주 벌어지는 고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고사를 지내는 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며 고사를 막았다. 건설업계는 우상숭배가 심하다. 공사 착공땐 ‘안전기원제’, 공사 중간과 마지막에도 반드시 고사를 지낸다.

박 상무는 “그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며 “이미 은퇴한 이재규 사장이 다시 오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전했다. 이 사장은 “종교 편향이 아니다. 첨단 시대에 고사가 웬 말이냐. 어디서든 고사를 지내면 엄중히 문책을 하겠다”는 공문을 내렸다. 선교회의 기도와 결단으로 고사관행이 없어진 것이다.

선교회는 거의 매일 모인다. 월·화요일엔 선교회 리더가 회원들을 심방한다. 수요일엔 기도모임, 목요일엔 정기예배를 드리고 저녁엔 성경공부를 한다.

10년 전부터는 1년에 1∼2회 ‘성경알기 캠프’도 열고 있다. 새 회원을 대상으로 6주간 저녁마다 2∼3시간씩 성경을 가르친다.

글·사진=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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