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선 블로그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입니다.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를 거쳤습니다. 뻥선 티비, 뻥선 포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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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1> 국내 방송사 카라스키야戰 KO패 우려 중계 꺼려

누나에게 들은 어릴 때 이야기다. 누나 등에 업혀 미군 지프에서 던지는 초콜릿을 받으려다 개천에 떨어졌다. 누나가 내려가 보니 하나도 안 다쳤다. 누나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이를 본 사람이 엄마에게 얘기해서 크게 혼났다고 했다. 

조금 더 자라선 신문 배달하는 동네 형들을 따라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를 부르고 다녔단다. 얼마나 까불었는지 서울 돈암동에 살 때 군인이던 외삼촌이 집 앞에 세워 놓은 트럭에 동생과 올라 장난치다가 큰 사고를 내기도 했다. 이것저것 만졌는데 트럭이 움직이더니 내리막길로 달렸다. 그래서 남의 집을 부숴버렸고 이로 인해 신문 사회면에 처음 이름이 올랐다. 개구쟁이였지만 누나는 항상 내 편이었다. 시합을 앞두고 나를 격려했다. 

“수환아 넌 이겨, 엄마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폭격이 심했는 줄 아니. 그런 속에서도 넌 살았어.” 

엄했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읽으셔서 그런가, 비참하게 맞고 쭉 뻗어버린 시합은 없었다. 아니면 신의주 제2교회를 섬겼던 할아버지의 헌신이 4전5기 시합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3번을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KO패 하는 룰이 있었다. 카라스키야 측은 룰 미팅에서 ‘무제한 다운 룰’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어차피 KO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나 또한 판정을 원치 않았다.

당시 파나마엔 세계 복싱영웅인 로베르트 두란 선수가 있었다. 카라스키야의 인기는 두란을 능가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다들 기대했다. 나는 그들 파티에 제물이었다.  

파나마는 더웠기 때문에 한 체급 올린 체중 감량엔 무리가 없었다. 남은 1주일은 시합 때 있는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도록 말수조차 줄여야 한다. 그때 한국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시합 1주일 전인 11월 20일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세계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김태호 선수가 상대 선수 세라노를 다운시키고도 10회전에서 KO로 졌다고 했다.  

또 다른 소식도 들렸다. 같은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파나마의 루한 선수가 자모라를 10회 KO로 이겼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복싱의 나라였다. 사파타, 루한, 두란에 이어 카라스키야까지 세계 챔피언이 된다면 파나마는 세계 챔피언 4명을 보유한 복싱 강국이 되는 것이다. 

복싱 연령으로는 늙은 나이 27세, KO율 30%인 내가 그들 잔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국에서는 이 시합을 중계방송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나 마나 뻔한 KO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싱을 좋아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1주일마다 한국선수가 KO로 지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김태호 선수의 시합을 중계했던 TBC 박병학 아나운서와 김재길 체육국장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홍수환 시합은 꼭 중계하겠다, 홍수환이 지면 국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다. 

온 국민이 복싱을 좋아했다. 세계 복싱계의 동향은 물론 선수 랭킹까지 줄줄 외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판치라인’이라는 복싱 전문지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카라스키야전 중계가 결정됐다. 계체량도 통과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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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빅 프로 처음 설정 이 영상이 최고

남의 영상을 블로그에 떡하니 담기는 처음인듯

제가 볼때 매빅 프로 처음 설정 블로그중에 이 영상이 제일 편한듯.

아직 시행은 안했는데 

바로 이 영상 따라서 해 볼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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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빅 프로 조종기 충전하는 방법(겨우 찾음)

DJI 매빅 프로 조종기 충전 방법 찾는데 애 좀 먹고 계시죠?

저 역시 기체 충전은 금방 알겠는데

조종기 충전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단자를 죄다 둘러봐도 그럴듯한 단자가 없어서

찾다 찾다 겨우 찾았지요.


저 같이 고민할 만한 분들을 위해 몇자 적어놓아요.

결론은 조종기 우측 스마트폰과 조종기를 연결하는 단자가 충전단자였어요.

아래 사진

왼쪽 단자를 빼놓은 부분 보이시죠?


단자를 보면 직사각형으로 돼 있거든요. 

그래서 박스에 포함된 것중에 충전 라인 같은 것(보통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충전 라인)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충전 라인은 한쪽이 약간 둥그렇게 돼 있거든요.

 

위 사진 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거더란 말이죠.

조종기 단자가 충전라인보다 크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아래 처럼 꽂힌답니다. 


그리고 USB 단자는 기체 충전용 어댑터에 연결하면 됩니다. 

어댑터에 2개의 USB 단자가 있더라고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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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대한민국 교회건축·리모델링 박람회 현장 사진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17 대한민국 교회건축·리모델링 박람회(KOCAD 2017)’ 현장입니다.

위 사진은 교회건축 세미나 모습. 국민일보 관계자들이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소선제 건축사사무소 부스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최삼규 국민일보 사장과 정재호 종교국장. 


박종화 국민문화재단 이사장이 사닥다리종합건설 부스에서 작품들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건축박람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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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대한민국 교회건축·리모델링 박람회 개막… 9월 1일까지 킨텍스서

"박람회 규모에 놀라고 제품 종류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가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보완할 게 있을지 찾으러 왔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30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2017 대한민국 교회건축·리모델링 박람회(KOCAD 2017)’ 현장. 관람차 이곳을 찾은 허경호(부천 순복음중동교회)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교회건축 리모델링 관련 정보를 한자리에서 비교·분석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고 했다. 행사장에서는 ‘국제음향·영상산업전(KOSOUND+STAGETECH 2017)’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규모가 크고 다양한 제품을 볼 수 있어 유익했다”는 반응이었다. 평소 음향시스템에 관심이 있어 행사장을 찾았다는 서울 광진구 차영준(24)씨도 “앰프, 스피커, 믹서 등 모든 최신 음향시스템을 보고 경험했다”고 만족해 했다. 

국민일보와 ㈜젠코리아, 서울전람㈜이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사닥다리종합건설, ㈜예일디자인그룹, 제이풀 등 교회건축 관련 업체가 참가해 부스를 마련했다.

음향업체인 ㈜케빅은 영상과 음향 효과를 강화한 스크린 골프장을 설치해 ‘멀티미디어 올인원 AV시스템’을 선보였다. ㈜사운드솔루션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조합, 진보된 3D객체 오디오 시스템을 선보였다. LED 스크린 업체인 ㈜씨디엠씨 부스에는 관람객이 몰렸다. ㈜씨디엠씨 는 265인치 LED 스크린을 설치하고 기술력을 뽐냈다. 

세미나실과 강의 부스에선 교회건축과 음향기술 등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백석대 기독교문화예술학부는 졸업작품으로 디자인한 강대상, 테이블, 의자, 책장 등을 전시하고 그 자리에서 판매도 했다. 

개막식은 오전 11시 전시회장 앞에서 진행됐다. 박종화 국민문화재단 이사장, 최삼규 국민일보 사장, 박임서 ㈔무대음향협회 이사장, 임익찬 방송음향산업협의회장, 정완섭 한국음향학회장, 한상업 국민일보 교회건축자문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최 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교회건축 박람회가 한국교회의 건축문화를 이끌어가는 품격 있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며 “앞으로도 좋은 열매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임서 이사장은 “기술 습득, 정보 교류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했으며, 박종화 이사장은 “이 박람회는 교회라는 전통, 음향·영상이라는 현대 기술의 만남”이라고 축사했다.  

박람회는 1일까지 진행된다. 입장료는 1인당 5000원이지만 사무국(02-711-4546)을 통해 모바일 초청장을 받으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kocad.co.kr·facebook.com/kosound.kocadl).

고양=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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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10> 카라스키야와 일전… ‘내 마지막 시합’ 각오 다져

"밴텀급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2㎏ 더 올려 주니어 페더급에서 힘 좀 써보자.’ 이런 각오로 연습량을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랐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와 싸운다는 건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했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희망을 못 줄지언정 “질 거면서 거기까지 왜 가냐”는 식이었다. 한 선배는 내가 콜롬비아 선수에게 KO로 패했을 때 “일어나서 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안 일어났다”고까지 했다. 복싱이라고는 1회전도 뛰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뭘 알겠나.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제재소에서 사온 통나무를 쪼개며 힘을 키웠다. 샌드백이 ‘ㄱ’자로 꺾일 만큼 펀치력도 키워 나갔다. 신도체육관 조순현 관장에게 어깨 힘 빼는 법도 배웠다. 

시합을 앞두고 권투위원회 회장님과 한 제과점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지더라도 잘 싸우고 와라. 오렌지 주스 하나 마셔.” 

적지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치르러 가는데 지더라도 잘 싸우고 오라니. 체중 조절하는 선수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하다니….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보란 듯이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맞다, 나는 기관총으로 탱크 쏘러 가는 바보다.’ 이를 악물었다.

만나는 상대가 모두 KO승을 자랑했다. 태국 수코타이 18승 16KO승, 자모라 26승 전승 KO승, 카라스키야도 아마추어 전승으로 11승 모두 KO승이었다. 내 승률은 희박했다. 공항에 나온 가족들에게 필승을 다짐하며 비행기를 탔다. ‘이게 마지막 시합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테말라, 파나마로 가는 항로였다. 이기고 귀국하느냐 아니면 탱크에 기관총 쏘다 오느냐의 문제였다. 비행기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서 벌어진 동네 복싱시합을 보러 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나와 같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그때까지 47번을 싸우면서 시합마다 경기 전 망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시합을 마치면 또 산소를 찾았다. 모두 94번이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를 앞두고도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자마자 “아버지가 그렇게도 예뻐하시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어릴 때 막내 여동생이 집에서 기르던 하얀색 큰 불도그에게 목이 물렸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고 어린 여동생을 구했다. 이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수환이 순발력이 엄청 빠르네.” 여동생에게 가까이 있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랐다. 

할머니 생각도 났다. 서울 돈암동에서 살 때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항상 책을 읽었다. 표지는 검정색, 옆은 빨간색인 작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하나님 말씀 책”이라고 하셨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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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9> “네가 이겼으면 문제 없었잖아” 조롱에 이 악물어

자모라 선수와 경기를 끝낸 다음 날 서울 남영동 ‘두꺼비체육관’을 찾았다. 인천구치소에 가 있는 형을 생각했다. 그 경기 9회전에서 멕시코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다가 그 장면이 사진에 찍히는 바람에 구속된 것이다. 

자모라 선수의 짧은 왼팔이 어떻게 내 오른쪽 턱뼈를 금 가게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체육관의 한 선배에게 물었다. “형, 내가 왜 그놈 왼손에 그리 맞았지?”

“아니, 네가 그걸 몰라?” “모르겠는데….” “네가 왼손을 뻗으며 들어갈 때 그놈이 왼쪽으로 돌면서 왼손을 뻗었어. 그러니까 들어갈 때마다 오른쪽 턱이 맞더라고.”

‘돌면서 치니까 내 오른손 가드 사이로 파고들면서 오른쪽 턱을 맞힌 거구나.’

그 선배가 또 말했다. “수환아, 내가 보기엔 네 체중도 문제야. 네 몸에 밴텀급은 무리야, 잘 생각해 봐라.” 

한동안 턱이 아파 잠을 못 잤다. 인천구치소에 있는 형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왔다.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를 봤다. 미국 LA에서 자모라에게 질 때 받은 8만 달러, 4000만원에서 트레이너 두 명 800만원, 매니저 한 명 1200만원을 떼어주고 나머지 2000만원으로 해방촌 목욕탕을 샀다. 자모라를 한국으로 부를 때 이 목욕탕을 팔았다. 돈이 모자라 종로에서 양복점을 하던 이일호 복싱 원로의 도움을 받았다.  

신문 기사는 나를 놀렸다. ‘막 내린 홍수환 시대’ ‘역시 자모라’…. 어느 누구도 억울했던 9회전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결과만 놓고 따졌다. 형님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하는 말. “네가 이겼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잖아.” 

귀찮다는 식이었다. 복싱이 크게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커피 한잔 대접받지 못했다. 건성으로 인사만 하고 나와 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상대에게 맞은 상처로 엉망인 내 얼굴을 봐서라도 봐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큰누나를 찾아갔다. 누나에게 비행기값이라도 달라고 해 외국에 가서 경기하고 이겨서 돌아오고 싶었다. 누나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여성 두 분이 나를 알아봤다.

“어머, 홍수환 선수다. 얼마나 아프세요? 한 번 더 도전하세요.”

그날 나는 두 번 울었다. 인천 검사실 앞에서 억울해서 한 번, 누나 가게 앞에서 감격해서 한 번 울었다. 큰누나에게 돈을 얻어 하와이로 향했다. 일본인 프로모터에게 가서 경기 주선을 부탁했다. 

‘한 번 더 해보자. 반드시 이기리라. 이겨야 원수를 갚는 거다.’ 

상대는 필리핀의 바스케스라는 선수였다. 뛰고 또 뛰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달렸다. 아침에 일어나 뛰는 것은 복싱 선수에게 산삼과 같다. 만장일치로 이겼다.  

그즈음 WBA에서 주니어 페더급을 새로 만들어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귀국해서 염동균 선수와 일본 다나카 선수를 이기고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11전 11승 11KO승의 파나마의 괴물 선수 카라스키야와 한판 붙게 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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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수환 <8> 심판의 편파 진행… 자모라에 설욕 무산

자모라 선수와의 대전료는 12만 달러였다. 1년 반 전 미국 LA에서 방어전할 때 받은 8만 달러보다 4만 달러를 더 줘야했다. 나는 내 돈 4만 달러를 들여 자모라를 불러들였다. 

‘내가 미국 가서 졌으니 너도 와서 깨져봐라.’ 

문제는 체중이었다. 한계 체중 53.520㎏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1년 반 전에도 결국은 체중 실패로 꿀 먹고 취해서 타이틀을 뺏긴 것 아닌가. 나이는 26세가 됐고 체중은 점점 빼기 어려워졌다.

어쨌든 사력을 다해 연습했다. ‘복싱이라는 것이 꼭 주먹만 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 전에 먹은 꿀 때문에 졌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다. 드디어 시합 날 아침 간신히 한계 체중을 통과했다. 자모라도 쉽지는 않았던지 얼굴이 핼쑥했다. 체중을 잴 때 팬티까지 벗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자 더 잠이 오지 않았다. 

1976년 10월 16일 오후 5시 인천 선인체육관. 관중은 꽉 들어찼다. 1회전. 아뿔싸! 슈즈 신은 것이 잘못됐다. 강한 이미지를 보이려고 까만 슈즈를 신고 링에 올랐는데 안쪽 밑창이 반질반질해 내 양말이 미끄러져 안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엄지가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신발을 신고 시합했을까.’ 양말이 두꺼우니 신발을 벗고 했어야 했다. 아차 싶었다.  

상대의 복부를 노렸다. 자모라가 빠지면서 왼쪽 어퍼컷을 날렸다. 내 이마에 적중했다. ‘이거 봐라’싶었다. 1년 반 전의 주먹이 아니었다. 

울분의 주먹 홍수환, 100% KO승률을 유지하려는 자모라의 시합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양발 엄지의 통증이 심해졌다. 운명의 라운드인 9회전 내가 뻗은 원투 스트레이트에 자모라가 걸렸다. 링 쪽에서 빠져나오려다 링 줄에 걸렸다. 다시 한번 들어가 때리려는 순간, 심판이 끼어들어 등으로 막았다. 

심판은 멕시코 사람이었다. 멕시코 선수와 세계 타이틀 매치를 하는데 멕시코 심판을 부르다니…. 제3국인 일본 심판 등을 불렀다면 나는 당연히 9회에서 KO승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아쉬운 9회전이었다.  

11회전. 발도 아팠고 빼기 어려운 체중을 억지로 뺐더니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자모라도 10회전을 뛴 경험이 없었다. 그 역시 체력이 소모됐다. 11회전 끝 무렵이었다. 내가 코너에 몰렸다. 

다행히 “땡!”하고 종이 울렸다. 나는 내 코너로 들어가려 했다. 자모라는 종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공격했다. 30초나 지연됐다. 코너에 들어가 마우스피스만 갈아 물고 나와야 했다. 

운명의 12회전. 다시 코너에 몰려 자모라의 연타를 맞았다. 견딜 수 있었다. 펀치력은 약해도 강한 맷집이 있었다. 그런데 심판이 끼어들더니 자모라의 손을 들어버렸다. 한 번의 카운트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관중들이 링을 점령했다. 내 형은 심판의 멱살을 잡았다. WBA는 결국 무효 경기(no contest)를 선언하고 재시합을 하기로 했다.  

자모라.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나보다 키도 작고 팔도 짧은데 어떻게 내 오른쪽 턱을 강타할 수 있었을까. 그 근본 원인을 알아야 했다. 물론 엄지발가락이 아팠던 것, 잠 한숨 자지 못한 것, 멕시코 심판이 온 것, 11회전이 끝난 후 30초간 연타를 맞은 것,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12회전에 나온 것 등 정말 억울한 일이 많았지만 말이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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